치자꽃은 밤에 핀다.
서울 구치소의 공기는 살아있는 것들의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절망과 포기가 응축되어 끈적하게 달라붙은 듯한 냄새, 소독약 냄새마저 집어삼키는 그 무겁고 축축한 기운이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형광등의 단조로운 소음과, 복도 저편에서 모든 희망에 종지부를 찍듯 육중하게 울리는 철문 소리만이 이 공간의 유일한 배경음악이었다.
13번 접견실. 방은 생각보다 더 비좁았다. 낡은 책상과 의자는 바닥에 볼트로 고정되어 있었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두꺼운 아크릴판은 수많은 긁힌 자국으로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마치 우리가 보는 진실이 이미 수많은 편견과 상처로 인해 흐릿해졌음을 상징하는 듯했다. 잠시 후,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의 교도관이 김민석을 데리고 들어왔다. 차가운 아크릴판 위로, 겁에 질린 그의 얼굴과 지쳐버린 내 얼굴의 잔상이 유령처럼 겹쳐 보였다. 이 작은 방 안에서, 나와 그는 이제 운명 공동체였다.
"국선이시군요."
그는 나를 보는 대신, 낡은 아크릴판 위 내 얼굴의 잔상을 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체념과 경멸이 뒤섞여 있었고, 나는 그에게서 내가 10년 전 법정에서 보았던, 내 자신을 향한 경멸의 시선을 읽었다.
"기대도 안 했습니다."
나는 그의 반응이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서류 가방에서 사건 기록 복사본을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그중 가장 끔찍한 현장 사진 몇 장을 골라 아크릴판 너머로 밀어 넣었다.
"김민석 씨, 나는 당신을 믿어주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나는 이 그림에 흠집을 내러 왔습니다. 검찰이 그린 그림이 아닌, 다른 그림을 그릴 재료가 있는지 확인하러 온 겁니다. 그러니 내게 거짓말할 생각은 마십시오. 당신의 진실이 아니라, 내가 법정에서 써먹을 수 있는 '이야기'를 주십시오."
나의 직설적인 말에 그는 한참 동안 입술만 달싹였다. 그는 사진을 내려다보는 대신, 아크릴판 너머의 나를 꿰뚫어 보듯 응시했다. 그 눈빛은 겁에 질린 피의자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평가하고, 시험하는 듯한 날카로움이 있었다.
"변호사님은... '이야기'를 잘 만드시는 분입니까?"
그의 기습적인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방 안의 공기가 진공상태처럼 느껴지는 긴 정적이 흘렀다. 그는 마치 무대 위 배우가 가장 중요한 대사를 앞두고 숨을 고르듯,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에서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저는... 희연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설령 제가 희연이를 죽였다고 해도, 저는 '정원사'가 아닙니다."
그의 말에 나는 방금까지 앉아 있던 의자가 바닥으로 꺼져버리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미친놈인가? 순간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살인을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살인범으로서의 정체성을 논하는 이 기괴한 논리. 하지만 그의 눈은 미치광이의 그것과는 달랐다. 너무나도 냉정하고 또렷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말은 내 머릿-속에 섬뜩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진짜 정원사는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나는 이 남자의 진짜 욕망을 깨달았다. 그는 무죄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견딜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작품'이 졸렬한 모방범의 소행으로 치부되거나, 혹은 자신이 감정 하나 통제 못 하는 미숙한 살인범으로 낙인찍히는 것이었다. 이 남자는 결백을 증명받고 싶은 게 아니라, 자신이 저열한 괴물이 아님을, 오히려 그 반대임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의 법정은 유무죄를 가리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격을 증명하는 무대였다.
그는 연인의 끔찍한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대신, 자신이 저열하고 미숙한 살인범으로 취급받는 것을 모욕스러워하고 있었다. 그의 자존심은 연인의 죽음보다, 자신의 자유보다 위에 있었다. 나는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체념 뒤에 숨겨진 차가운 분노와 뒤틀린 자의식을 보았다. 이 남자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었다. 훨씬 더 복잡하고 위험한 존재였다. 나는 그의 그 기이한 자존심이, 검찰이 만든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릴 유일한 균열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이 '정원사'가 아니라는 사실, 내가 법정에서 증명해 보겠습니다."
구치소를 나오는 내 발걸음은 들어갈 때보다 훨씬 무거웠다. 내 어깨 위에는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닌, 거대한 악의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십 년간 잿더미 속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패배와 체념으로 차갑게 식어버렸던 혈관에, 뜨거운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이것은 정의감이나 사명감이 아니었다.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지독한 악취가 나는 진창 속에서만 살아있음을 느끼는, 비틀린 생존 본능이었다. 나는 썩은 동아줄인 줄 알고 잡았다. 하지만 그것은 교활한 지성으로 무장한 악마의 꼬리였다. 나는 그 꼬리를 잡고, 기꺼이 지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 보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