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꽃은 밤에 핀다.
미세 섬유 감정서. 그것은 최진혁 검사가 쌓아 올린 견고한 증거의 성벽에서 우리가 발견한 유일한 균열이었다. 하지만 그 균열은 너무나 미세해서, 망치로 내려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박수진 변호사에게 말했다. "이 섬유가 김민석의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게 아니라, 김민석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야 해."
우리의 작업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국선 변호사실에 배당된 비좁은 자료실에서, 우리는 먼지 쌓인 과거의 기록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나는 법정에서 사용할 논리를 만들었고, 박 변호사는 그 논리를 뒷받침할 현실의 조각을 찾아 나섰다. 그녀는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그를 짓눌렀던 누명에 대한 분노를 연료 삼아, 단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다. 박수진 변호사는 거의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식어버린 컵라면과 에너지 드링크 캔이 무덤처럼 쌓여갔다. 그녀는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통화 기록과 계좌 내역을 대조하며, 의미 없어 보이는 숫자들의 바다에서 필사적으로 패턴을 찾고 있었다.
"선배님, 찾았습니다."
어느 날 새벽,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잠기운과 피로에 지쳐 있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흥분이 담겨 있었다.
"세 번째 희생자 강지혜, 그리고 네 번째 희생자 안희연. 두 사람 다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 정확히 동일한 금액인 500만 원을 같은 계좌로 송금했어요."
나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화면에는 수신인 불명의 차명 계좌 번호가 찍혀 있었다. 검찰은 이 거래 내역을 단순 채무 관계로 보고 수사를 종결한 상태였다.
"여기서 막혔었어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송금 날짜 직후, 두 사람의 카드 사용 내역을 대조하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강남의 '엘리시움 정신 클리닉'."
'엘리시움 정신 클리닉'. VVIP들을 위한 최고급 심리 상담소. 철저한 비밀 보장을 원칙으로 하는 곳이었다.
"두 사람 다 클리닉 예약자 명단에 '벨라(Bella)'라는 동일한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상담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요. 예약만 되어 있고, 방문 기록은 삭제된 것처럼요."
연쇄살인 피해자들이 같은 날, 같은 금액을 보내고, 같은 가명으로 최고급 상담소에 예약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더 이상의 증거가 없었다. 박 변호사는 접근 방식을 바꿨다. 클리닉이 아닌, 안희연의 주변을 파고들었다. 그녀가 찾아낸 것은 한 연예 매체의 B컷 사진이었다. 유명인 스캔들을 쫓던 기자의 카메라에, 우연히 안희연과 한 남자가 함께 있는 모습이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그녀는 사진 속 남자의 신원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한 방을 찾아냈다.
"이선우... 유력 정치인 이병권 의원의 아들입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흩어져 있던 모든 조각들이 '이선우'라는 이름 아래 섬광처럼 하나로 합쳐졌다. 두 명의 피해자, 의문의 송금, 같은 가명, 최고급 클리닉, 그리고 권력자의 아들.
나는 텅 빈 벽을 바라보았다. 검찰이 그린 완벽한 그림 위로, 전혀 다른 모습의 진짜 그림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이선우는 단순히 유력 정치인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성역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를 건드리는 순간, 우리는 김민석이 아닌, 보이지 않는 거대한 권력과 맞서야 했다.
나는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과거에 내가 외면했던 진실이, 이제 내 손에 쥐어진 것이다.
"이질적인 조각이 드디어 나타났군. 최진혁 검사가 애써 감추거나, 혹은 보지 못했던 그림의 빠진 조각 말이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증거의 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김민석을 향해 촘촘히 엮여 있던 붉은 실들을 하나씩 뽑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실들을, 벽의 한가운데 새로 붙인 이선우의 사진을 향해 다시 엮었다. 사무실의 그림은 완전히 바뀌었다.
김민석은 더 이상 유일한 용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 거대한 그림을 가리기 위한 가장 편리한 연막이었을 뿐이다. 이제 싸움의 국면이 완전히 바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