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것들 앞에서
홀로 사는 삶이지만, 많은 이들에게 시간의 빚, 말의 빚, 그리고 알게 모르게 많은 빚을 지고 산다.
나 잘나서 직장 다니고, 좋은 구두, 좋은 옷,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 같지만——
허세가 지쳐 쉴 때, 문득 깨닫는다.
온전히 내 몫은 숨 쉬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어느 날, 먼 강물을 보러 두물머리에 갔다.
그러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강이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이름을 가졌어도, 그것만은 이름이 없어 보였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고통은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데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자신을 정의하는 데 몰두한다.
더 나은 이름을 얻고, 더 나은 형상을 가지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들풀은 이름이 없어도 피었다가 지고, 바람 따라 흩어질 뿐이다.
그것은 어떤 기대도, 어떤 욕망도 없이 오롯이 존재한다.
이름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유롭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름을 짊어지고 살아왔다.
좋은 직장인, 인정받는 컨설턴트, 책임감 있는 어른,
어떤 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아야 하는 강한 사람.
그러나 가끔은——그 모든 이름을 내려놓고 싶어진다.
강물은 아무것도 머금지 않고 흘러가고,
들풀은 자기 자신이 되려 하지 않고 존재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 무엇도 증명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방패처럼 움켜쥐고 있던 이름 하나를
들풀 옆에 조용히 내려두고 왔다.
어쩌면, 그 순간 나는 조금 더 자유로워졌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