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자 곁에 불행한 자들이 모인다. 이 현상은 단순한 심리적 공감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공명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듯, 특정 입자들이 특정한 파동에 공명하듯, 사람들 또한 비슷한 정서적 파동을 가진 이들끼리 끌리기 마련이다.
불행은 강렬한 파동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주변의 유사한 파동을 가진 이들을 끌어당기고, 그 속에서 집단적 공명이 일어난다. 한 사람의 슬픔이 다른 사람의 슬픔과 만나 증폭되며, 불행의 에너지는 더 커지고 깊어지며 집단적 서사를 형성한다.흥미로운 점은, 슬픔의 반복과 과장 과정이 마치 엔트로피의 역학처럼 작동한다는 것이다.
엔트로피는 우주의 무질서도가 점차 증가하는 경향을 설명하는데, 슬픈 이야기도 처음에는 거칠고 무질서한 원초적 감정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그것이 반복되고 윤색될수록 마치 엔트로피의 흐름을 거슬러 점점 더 정돈된 형태의 이야기로 변형된다. 이는 마치 열역학의 "정보 엔트로피"와도 유사하다.
슬픔의 이야기들은 그 과정을 통해 더 단순하면서도 더 극적인 서사가 되고, 결국 그것이 한 사람의 정체성이 되어버린다.
삶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물리학의 불확정성 원리와 닮아 있다.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우리는 한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 삶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삶의 일부를 포착하려는 순간, 다른 중요한 요소는 흐릿해진다. 장님들이 코끼리의 일부를 더듬으며 그것을 삶의 전부로 규정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누구는 다리를 붙들고 삶을 단단한 기둥으로 해석하며, 누구는 꼬리를 붙들고 가느다란 밧줄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관찰한 삶의 한 조각은 결코 그 전체를 담아내지 못한다.
이런 부분적 관찰은 정보 전달의 신경과학적 메커니즘에서도 설명될 수 있다. 우리의 뇌는 모든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기에, 특정 경험과 감정에 우선순위를 둔다. 만약 어떤 이가 똥 묻은 코끼리의 다리를 보았다면,
그의 뇌는 그 불쾌한 기억을 우선적으로 저장하고, 그것을 삶의 대표적 서사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기억을 가진 이들과 함께 자신의 서사를 강화하며, 그들의 세계관은 점점 더 그 똥 묻은 조각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우주는 끊임없이 확장하고 변화하는 시스템이다. 삶도 그와 다르지 않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신경 가소성(Neuroplasticity)을 통해 기존의 사고 패턴을 벗어나 새로운 관점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반복되는 슬픔의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는 그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 있다. 집단적 공명 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진동수를 만들어낼 수 있다. 불행의 파동이 아니라, 창조와 가능성의 파동을 생성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진정한 능력이다.
결국, 삶은 하나의 거대한 양자장(Quantum Field)처럼 작동한다. 우리는 각자 불완전한 관찰자이며, 그 불완전한 관찰이 삶의 형태를 규정한다. 하지만 우리의 관찰이 곧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삶은 우리가 가진 선택의 폭만큼 열려 있다. 똥 묻은 조각에 갇히지 않고, 코끼리의 전체를 상상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 상상 속에서 자기만의 새로운 파동을 생성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과학적 우주 속 인간 존재의 가장 창조적인 방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