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상캐스터의 죽음

by 이신

오요안나 사건이 처음 보도되었을 때, 사람들은 단순한 직장 내 갈등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차 밝혀지는 진실은, 단순한 갈등이 아닌 구조적 폭력이었다.

이 사건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반복되는 익숙한 형태의 배제와 괴롭힘이었기에 더 많은 이들이 공분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심지어 같은 성별 내에서도 무리에서 벗어난 개인을 겨냥한 잔혹한 ‘제거 작업’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늘 이렇게 변명한다.

"그냥 성격이 안 맞았어."

"그 친구도 문제가 좀 있었지."

"우리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


그러나 이건 단순한 불화가 아니었다.

이건, 집단적인 폭력이었다.


왜 그녀들은 무리를 지어 괴롭혀야만 했을까


우리는 원시 모계 사회에서부터 여성이 무리를 이루며 생존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협력의 공동체였지, 배척의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현대사회에서는 여성 집단 내의 배척과 따돌림이 빈번하게 발생하는가?


그것은 ‘경쟁’과 ‘배제’가 미덕이 되는 왜곡된 조직 문화 속에서,

다른 이의 불행을 발판 삼아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행태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오요안나는 그들의 기준에서 ‘튀는’ 존재였고,

그들이 보기에 ‘다른’ 존재였다.


그리고 그녀들은

"우리와 다르다"

는 이유로 무리를 지어 그녀를 향한 공격을 시작했다.


여성의 연대가 배척으로 변질될 때, 그 잔혹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같은 여자가 더 무섭다"는 말이 통용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직장에서 벌어지는 여성 간 집단 괴롭힘을 정당화하는 모든 구조를 부숴야 한다.


김가영, 그녀는 왜 양면의 얼굴을 해야 했는가


그 무리 속에서도, 유독 양면적인 태도를 보인 사람이 있었다.

겉으로는 친절했고,

때로는 동조했으며,

어쩌면 피해자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무리에 속하는 편을 택했다.

오요안나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을 사람이었지만,

그녀를 보호하기보다는 무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왜일까?

그녀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리에 속하지 못하면, 내가 다음 차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김가영은 가해자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피해자였을까.

어쩌면 그녀 역시 이 왜곡된 조직 문화의 희생자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살아남은 사람에게, 면죄부는 주어질 수 없다.


그녀는 왜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사람들은 묻는다.

"왜 그토록 견디기 힘들었을까?"

"조금만 더 버텨보지 그랬어."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까?"


하지만 한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을 결심할 때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 질문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알게 된다.


누군가는 버티지 못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버틸 이유가 없어서 떠난다.

끝없이 반복되는 배제와 따돌림 속에서,

어떤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다고 느낄 때,

그들은 떠나는 것만이 해방이라 믿게 된다.


우리는 피해자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다.

하지만 매번 너무 늦었다.


직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직장은 살아남기 위한 전쟁터가 아니다.

더 이상 ‘먼저 들어온 자’들이 텃세를 부리며,

뒤따라오는 이들을 괴롭히는 공간이어서는 안 된다.


직장은 생계를 위한 공간이며, 동료들은 상호 존중해야 하는 존재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단순한 인간관계가 권력화되는 순간,

무리 짓고 따돌리는 ‘사회적 폭력’이 시작된다.

더 이상 ‘선배’라는 이름으로, ‘팀워크’라는 명분으로

개인을 짓밟는 일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직장 내 선·후배 문화 속에서 자행되는 모든 폭력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

직장은 함께 일하는 곳이지,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권력을 다지는 곳이 아니다.


오요안나 사건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의 직장은 안전한가?"

"당신은 누군가를 방관하지 않았는가?"

"그녀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이 사회적 병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오요안나 사건이 단순한 직장 내 갈등이 아니었듯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건 개인적인 불화가 아니었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병리이자, 직장 내 폭력 문화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비극이었다.


직장은 먼저 들어온 자들의 텃세를 위한 공간이 아니다.

선배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위계적 폭력,

무리 지어 벌어지는 따돌림과 배제,

그 속에서 중립을 가장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방관자들.

이 모든 요소들이 모여,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바꿔야 한다.

더 이상 이런 형태의 폭력이 관행처럼 반복되지 않도록.


바뀌어야 할 것들:


✔ 직장 내 괴롭힘을 ‘문화’가 아닌 ‘범죄’로 간주해야 한다.

✔ 사회적 압력 없이도 가해자가 처벌받고, 피해자가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

✔ 선배-후배라는 틀을 깨고, ‘동료’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조직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 '내 일이 아니다'라는 방관이 피해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들은 늘 말한다.

"직장은 원래 그런 곳이야."

"사회생활이란 게 다 그렇지."


하지만 그런 생각이 또 다른 오요안나를 만들고,

또 다른 누군가를 절벽으로 내몰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는 바꿔야 한다.

우리는 또 다른 죽음을 애도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의 직장은 안전한가?"

"당신은 그 안에서 누구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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