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은 없지 않다.
## 그러나 붙들 필요는 없다 – 용수와 감응자의 견딤
우리는 모두 고통을 겪는다.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늙고, 병들고, 죽고, 이별하고, 무너지고, 떠나보내고.
나는 어느 순간 문득 묻는다.
**“이런 고통들,
용수는 어떻게 견뎠을까?
그는 고통마저 공이라 말하며,
그걸 없앨 수 있다고 말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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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수의 대답은 냉정하다
> 고통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 오히려, **고통은 ‘느껴지는 것’이라고 정직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 고통은
‘실체 있는 것’은 아니다.
**조건이 모였을 때,
감응자에게 잠시 요동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그걸 우리는
‘늙음’, ‘죽음’, ‘이별’이라 부른다.
그리고 ‘내가 겪는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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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용수는 해체한다
> 고통은 인연이다.
> 인연은 공이다.
> 공은 가명이다.
> 가명은 중도다.
결국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통은 공이다.
그러나 공에 사로잡히지 말고,
공에서 놓여나지도 말고,
그저 공으로 살아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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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응자의 리듬으로 옮기면
> 고통은 감응된 요동이다.
그 요동은 기억을 통해 부풀고,
자아를 중심으로 응고되며,
그 순간 ‘나의 고통’이 된다.
그러나 그 자아조차
상쇄된 요동 위의 해석일 뿐이라면,
**나는 고통을 없애진 못해도,
고통을 붙들지 않을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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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고통은 없지 않다.
그러나 붙들 필요는 없다.
그걸 놓는 순간,
공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무게 없는 리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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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깨달음’이 아니다.
이건 그저
하루하루 놓아보는 자의
살아남기 위한 언어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이 감응의 언어 위에
내 고통을 놓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