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문득, 파프리카의 성분표를 보았다
어느 날 문득,
홈플러스에서 사 온 파프리카 포장지 뒷면을 뒤적이다가
‘비타민C 풍부’, ‘항산화 성분 가득’, ‘루테인, 베타카로틴 함유’
이런 문구를 읽고 잠시 멈췄다.
도대체 왜?
왜 이 작은 채소 하나에
이토록 풍부한 영양소가,
이토록 정교하게,
마치 설계된 것처럼
빼곡히 들어 있는 걸까?
파프리카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매운맛을 포기한 고추다.
대신 색을 택했고,
단맛을 강화했고,
비타민과 항산화 물질을 탑재했다.
누군가가 자기를 먹어주길 바라면서.
그건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퍼지기 위한 전략**이었다.
씨앗을 멀리 보내고 싶었고,
그래서 자신을 더 맛있게, 더 아름답게 바꾸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세상 만물은 다 파프리카다.**
식물도, 동물도, 인간도—
저마다 **더 많이 남기기 위해,
더 오래 흐르기 위해,
자신을 조정하고 진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쓴다.
희생, 헌신, 부모의 마음.
살이라도 베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감정.
하지만 그 본질은 어쩌면,
파프리카가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 단맛을 택한 그 마음과 다르지 않다.
**사랑은 유전자의 감정화된 버전일지 모른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유로
좀 더 서사적으로, 좀 더 고귀하게 포장했을 뿐.
그러니까
누군가를 품고,
누군가를 위해 눈물 흘리는 그 장면조차—
결국은 **'내가 남기고 싶은 리듬'을 지키려는 존재의 몸짓** 아닐까.
그 날 이후,
나는 마트에서 파프리카를 볼 때마다
그저 비타민 덩어리 채소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생존의 서사체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조금 다른 마음으로
껍질째 씹는다.
**파프리카의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