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장난인가, 해방인가
– “존재가 없다”는 말이 진짜 의미하는 것
나는 오늘, 오래된 철학을 다시 읽었다.
“존재가 없다.”
“행위자도 없다.”
“행위도 없다.”
“결과도 없다.”
처음엔 말장난처럼 느껴졌다.
현실은 살아 있고, 우리는 상처받고, 후회하고, 분명히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을 부정하는 듯한 이 말이 정말로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1. “존재가 없다”는 말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이 말은 “세상은 가짜야”라는 식의 냉소가 아니다.
불교의 중론과 용수의 사유는 이렇게 말한다:
“존재는 있다. 하지만 네가 믿는 방식으로는 있지 않다.”
‘나’라고 믿는 이 자아,
그건 기억과 감정의 흔적,
관계 속 반응, 언어 습관의 조합이다.
고정된 실체로 여길 때, 우리는 집착과 자책에 붙잡히게 된다.
2. 행위와 행위자가 분리될 수 없다면?
용수는 묻는다:
“너와 네 행위가 완전히 동일하다면,
그건 네가 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분리된 행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다르다면,
그것 또한 네가 한 일이 아니다.”
결국 이분법 자체가 허상이다.
그 구조를 놓아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3. 법적으로는 말이 안 되잖아?
맞다.
이 철학은 법의 책임 구조엔 어울리지 않는다.
법은 행위자를 특정하고, 결과에 책임을 묻는다.
하지만 철학은 다르다.
그 책임의 구조에 영원히 자신을 가둬두는 사람에게,
숨 쉴 틈을 만들어주기 위한 해방의 언어다.
4. 감응은 본능이고, 반응은 선택이다
누구나 충동과 본능은 느낀다.
하지만 거기에 휘둘리지 않고, 관찰하고, 선택하는 게 인간이다.
이건 불교의 공 사상과 직결된다.
공은 무정부적 방임이 아니라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고도의 감응 상태”**를 의미한다.
5. 해방의 철학으로서의 “존재 없음”
“존재가 없다”는 말은 철학이 아니라 기술이다.
삶을 덜 괴롭게 살아가기 위한 실존적 언어 도구다.
우리는 늘 말한다.
“내가 왜 그랬지?”
“내가 그런 사람인가?”
“그때 그 말이 날 무너뜨렸어.”
이 모든 문장은
‘나-행위-결과’의 구조로 자신을 묶는다.
용수는 그 사슬을 하나씩 끊는다:
“그건 네가 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네가 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붙잡지 말아라.”
6. 자아의 환영, ‘임원 눈빛’에 대하여
어느 날 회사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임원이 된 사람이 퇴근 후에도, 식당에서도, 마치 여전히 임원인 것처럼 사람을 대한다.
그건 ‘임원’이라는 자아의 환영에 사로잡힌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자아는
회사라는 조건, 타인의 기대, 직함이라는 종이 쪼가리가
잠시 만들어낸 **가명(假名)**일 뿐이다.
그래서 그 자아가 무너질 때, 존재도 함께 무너진다.
“나는 누군가?”,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고립, 무기력, 자기 상실이 찾아온다.
7. 공(空)은 해체가 아니라 해방이다
“임원도 없고, 사원도 없고, 행위자도 없다.”
이건 현실을 부정하자는 게 아니라,
너무 꽉 쥐고 있지 말자는 것이다.
그 말은 철학이 아니라 살기 위한 기술이다.
붙잡지 않는 자아,
과거의 말이나 실수에 묶이지 않는 존재.
그건 무책임이 아니라 존재의 경량화다.
너는 임원이 아니고,
누군가의 자식도 아니고,
SNS 팔로워 수도 아니고,
그때의 실수도 아니다.
너는 지금 이 순간,
감응하고 있는 생의 리듬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