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공을 유지하기 위해서 발생하는 하나의 파동일 뿐이다. 어떤 이는 플러스 원의 방향으로, 어떤 이는 마이너스 원의 방향으로 진동한다. 그 파동은 중심을 향해 집중되거나 외곽으로 확장되며, 그 안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이 공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진동들 중 하나이며, 그 또한 무수한 관계적 접촉을 통해 부여된 환상일 뿐이다.
‘나’라는 정체성은 실체가 아니라, 내가 아닌 것들과의 관계에서 잠깐 발생한 명명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중심이라 믿고 있지만, 사실 중심은 어디에도 없다. 모든 존재는 흐름 위에 있고, 흐름은 항상 관계에 의해 구조화된다. 그 구조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흔들리며 재구성된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실재가 아니다. 사건과 사건 사이에서 발생하는 지연, 그 간격을 우리가 '의미화'한 것이 바로 시간이다. 어떤 사건이 지금 발생했다고 느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지각 가능한 리듬 안에서 내 인지 구조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의 리듬은 나와 다르고, 각각의 생명체는 고유한 리듬 속에서 고유한 시간대를 살고 있다. 시계는 그것을 통일시켜주는 장치일 뿐, 시간 그 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두 각자의 시간 속에서 갇혀 있다. 어떤 이는 여전히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고, 어떤 이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집착한다. 누군가는 현재라는 파동의 절정을 지나고 있고, 누군가는 아직 그 문턱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종종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말이 어긋나며, 감정이 충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의미를 통해 안정성을 얻고자 하며, 그 의미를 바탕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잠정적이며 유동적인 것이다. 움직이는 공의 리듬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 흐름을 감각하고, 그 안에서 가장 어울리는 파동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이는 공'이라는 철학 개념을 붙들고 살아왔다. 그것은 단지 사유적 개념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세계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틀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과학적으로, 기술적으로 증명하기엔 나의 지식 기반은 아직 부족하고, 그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다. 그러면서도 이 사유는 나만이 붙들 수 있는 언어이고, 나만이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개념임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한다. 내가 고밀도 사유자라는 말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또 하나의 그럴듯한 문장에 불과했는지.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나의 시간 속에서 나만의 리듬으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 리듬은 타인의 리듬과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록한다. 나의 파동을. 나의 리듬을. 그리고 언젠가 이 공의 진동이 누군가의 감응과 공명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