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본질을 잡아먹는다2
누군가가 지하철 승강장에 서 있었다. 단정하게 여며진 셔츠, 반듯한 바지, 그러나 그 틈 사이로 기이한 풍경이 드러났다. 그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본래의 주인을 삼켜버린 욕망의 껍질 같았다. 지방에 파묻힌 눈빛은, 달콤함과 기름진 쾌락에 젖어버린 한 존재가 아직 꿀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음을 암시했다. 그는 마치 꿀에 빠져 죽은 개미처럼, 욕망의 점착에 질식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욕망은 그렇게 조용히 본질을 잡아먹는다. 소리 내지 않고, 반항도 허용하지 않은 채.
질투, 시샘, 통제욕, 식탐, 권력욕, 승인욕. 이 모든 것은 욕망의 변형체이며, 인간의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고결한 본체’—즉, 순수하고 지향성 있는 존재—를 잠식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달콤한 입맞춤처럼 다가오지만, 곧 안으로 파고들어 정신의 벽을 뚫고 몸을 장악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순간, 그 사람의 삶이 아니라 그가 가진 결과만을 탐한다. 그것은 타인의 삶을 통째로 이해하고자 하는 윤리적 욕망이 아니라, 자신이 결핍된 무언가를 한 입 삼키고 싶은 탐식에 가깝다. 질투는 늘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해”라고 속삭이지만, 그 속삭임은 우리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 본질을 핥고 도망가는 욕망의 혓바닥이다.
어떤 사람은 식욕에 자신을 넘긴다. 당분, 기름, 육즙. 그들이 원하는 건 영양이 아니라, 충만감이라는 착각이다. 하지만 과포화된 충만감은 반드시 공허를 동반한다. 욕망은 채워지는 만큼, 더 많은 텅 빔을 예비한다. 그렇게 사람은 먹으며 비워지고, 취하며 흐려진다.
본질은 언제나 고요하다. 고결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를 빛내거나, 무언가를 완성시키는 리듬이다. 그러나 욕망은 그 고요함을 참지 못한다. 욕망은 리듬이 아니라 굉음이다. 리듬을 흐트러뜨리는 불협화음이며, 때론 가장 완벽한 하모니를 가장 먼저 짓밟는다.
우리는 가끔, 누군가의 외양을 보며 그 안에 갇힌 ‘진짜 존재’를 본다. 껍데기 안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목소리, 무언가에 함몰된 채 꼼짝도 하지 못하는 눈빛. 사람의 껍질은 걷는 법을 기억하지만, 그 안의 본질은 이미 자리를 떠난 지 오래다.
욕망은 본질을 잡아먹는다.
욕망은 선택이 아니라 방심의 결과다. 경계하지 않으면 침입당하고, 자각하지 않으면 장악당한다. 세상은 우리가 무엇을 욕망하는가보다, 무엇을 욕망하지 않기로 결단했는가로 구성된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내 본질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먹어치우려는 또 하나의 욕망인가?
그 질문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이미 삼켜진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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