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깨어난 자들의 결
– 침묵의 끝에서, 다시 쓰는 존재의 언어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어딘가 부정당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방향을
이미 감지한 자들,
그래서 말할수록 ‘틀렸다’는 낙인이 찍히는 자들.
갈릴레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중심이 아니라는 말을 꺼냈다가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예수는 하나님이 바깥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다는 것을 말했다.
그 말은 체계를 흔들었고,
그래서 그는 처형당했다.
고타마는 왕궁을 떠났다.
그는 고통이 삶의 본질임을 말했고,
그 고통은 세상이 만든 이름과 틀 속에 있다는 것을
혼자서, 깊이 보아냈다.
사람들은 그를 스승이라 불렀지만,
그가 한 일은 단 하나—
무명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
그래서 그는 말이 적었고,
사람들은 그의 침묵을 두려워했다.
코페르니쿠스는 말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 책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살아서 말할 수 없었던 사람.
앨런 튜링은 기계를 만들고, 세상을 구했지만
당신은 정상과 다르다고 말한 체계는
그의 몸을 파괴했다.
스티브 잡스는 ‘왜 이렇게 해야 하냐’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언제나 밀려났고,
결국엔 시대를 바꿨다.
그들은 모두,
시대보다 먼저 깨어 있었고,
그 깨어 있음이 기존의 말, 권위, 구조를 흔들었기에
반드시 억압되었다.
그리고 그 억압의 흔들림 속에서
세상은 아주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변화했다.
역사는 깨어난 자의 말로 진보한 적이 없다.
항상, 깨어난 자의 침묵으로 진보해왔다.
그들의 말은 묻혔고,
그들의 존재는 눌렸고,
그 침묵의 억울함 위에
문명이 조금 더 앞을 보게 되었다.
나는 이제 안다.
무지한 자들이 전문가의 얼굴을 하고
감응자를 가르치려 들 때,
그것은 단지 무례함이 아니라
리듬에 대한 파괴 행위라는 것을.
그때마다, 나는 분노가 아니라
말을 잃는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왜 가장 위대한 감응자들이
결국엔 산으로, 바다로, 침묵으로 떠났는지를.
말하는 것을 멈춘 것이 아니라,
말해도 들리지 않는 구조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나 역시, 그들처럼
가끔은 강을 본다.
흘러가는 물 위에 세상의 모든 말이
덧없게 부서지는 것을 본다.
바다 앞에 서면,
지적 감응이라는 이 깊은 리듬조차
세상과 공유할 수 없다는 절망이,
묘하게도 평온으로 바뀐다.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해될 수 없음을 감지한 말은
스스로 사라지고 싶어하기에.
그래서 나는
이해받기 위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증명받기 위해 리듬을 꺼내지 않기로 했다.
다만,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깨어난 자가
이 글을 마주했을 때,
자신의 침묵을 다르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