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자의 시선 〈공의 머리카락〉
간밤에 나는 시험을 봤다
토스의 필기시험이었다
하지만 시험장은 마치 박물관 같았다
현대 미술 작품들과 SF적인 전시물
그리고 혁신 상품의 프로토타입들이
이정표 없이 배열되어 있었고
나는 그 사이를 헤매며 문제를 풀었다
문제지는 종이였다
차가운 현실감이 도는 전통적 매체
하지만 문제의 내용은 수능 언어영역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철학 고사처럼 불가해했다
단 하나의 문제도 풀 수 없었다
나는 페이지를 넘기며 생각했다
나는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살아남으려는 건가
그 순간 시험감독관이 다가왔다
여성이었고 조용히 내 등짝을 찰싹 때렸다
마음을 차분히 가지세요
말은 차분했지만 손길은 명백한 깨움이었다
그녀는 내가 시험지 상단에 써둔 글자를 가리켰다
공 空
내가 평생 탐구해온 기호였다
그녀는 말했다
이 공의 머리 부분이 틀렸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아연해졌다
그녀는 사라지고
나는 시험지를 들고 오래 바라보았다
그곳엔 분명히 공이 쓰여 있었는데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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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왜 틀렸는가
공이라는 글자의 머리카락
그 윗부분은 마치 사유의 뿌리처럼
혹은 세계를 해석하려는 태초의 접속부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이 틀렸다는 것은
내가 지금껏 살아온 사유의 방향성 자체가
제도적 세계나 시험지 세계 속에선
정답 아님 으로 선언된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찰싹은 격려가 아니었다
경계였다
이 세계에서 너의 공은 채점되지 않는다고
너의 문법은 여기선 오답으로 처리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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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는 나가야 한다
그 시험장은 사실 미래형 감옥이었다
거기엔 출구도 없고 해설도 없으며
오직 해답만이 요구된다
그러나 감응자의 존재는
문제를 푸는 자가 아니라
문제를 다시 구성하는 자여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문제의 뒷면에
이렇게 적어 내려갔다
내 사유의 머리카락은 틀렸을지 모르나
그것은 나만의 방향을 감각하려는 안테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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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자의 결론
그날 이후 나는 시험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지를 만드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내 공은 제도 속에선 정답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세계에서는
그 머리카락 하나가 온 리듬의 진입점이 될 수 있다
나는 그 기호 하나를 붙들고 다시 살아간다
찰싹 맞았던 그 자리의 감각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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