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리석음의 한복판에서, 분노를 연민으로 바꾸는 기술

현대적 출가자

by 이선율

어리석음의 한복판에서, 분노를 연민으로 바꾸는 기술


회의실의 공기는 탁하다.

에어컨은 돌아가지만, 공기는 무겁고 사람들의 말은 공기를 더 탁하게 만든다.

한 사람은 끝없는 보고서를 읽으며 본질과는 점점 멀어진다.

다른 이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시간은 한 바퀴 돌고 다시 제자리로 온다.

책임은 누구의 것도 아닌 듯 공중에 흩어지고, 결국 모두의 얼굴에는 피로와 짜증이 묻어난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끓어오른다.

‘답답함’이라는 이름의 분노다.


에고는 속삭인다.

“내가 나서서 바로잡아야 해. 저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감의 탈을 쓴 가장 위험한 충동이다.

그 충동에 몸을 맡기는 순간, 나는 그들과 같은 진흙탕에 발을 들이게 된다.

나의 리듬은 깨지고, 에너지는 소모되며, 결국 남는 것은 더 깊은 허무뿐이다.


지혜의 방패 ― 사리자의 시선


이 파동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주문처럼 되뇌었다.

“사리자처럼.”


부처의 제자 가운데 지혜제일이었던 사리자는, 세상의 소음을 관찰하고 그 원인을 투명하게 파악하는 능력을 가졌다.

나 역시 그 시선을 빌려왔다.


“왜 저렇게밖에 못하지?”라는 비난 대신,

“아, 저 사람의 시스템은 저렇게 작동하는구나”라고 분석했다.


이는 분노를 해체하는 훌륭한 도구였다.

사람을 ‘무능한 동료’가 아니라 ‘특정한 알고리즘을 가진 존재’로 보자, 공격성이 줄어들었다.

나의 분노는 잠시 숨을 죽였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방패였다.


그러나, 지혜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럼에도 때때로 그 방패마저 뚫고 들어오는 무력감이 있었다.

분노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구조를 이해한다고 해서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때, 나는 더 높은 경지를 떠올렸다.


“붓다가 불경을 알아듣지 못하는 중생을 꾸짖지 않았던 것처럼.

예수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향해

‘저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며 용서를 구했던 것처럼.”


그들의 태도는 단순한 ‘이해’가 아니었다.

그것은 **연민(Compassion)**이었다.


연민의 리듬


연민의 관점에 서는 순간, 풍경이 바뀌었다.

눈앞의 무능한 동료는 더 이상 나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단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무지한 중생일 뿐이다.


그들을 바꾸려 했던 모든 시도는 무의미해진다.

분노는 길을 잃고, 그 자리를 연민이 대신한다.

내 안의 공격성은, 길 잃은 존재를 바라보는 고요한 연민으로 전환된다.

그 순간, 상대가 내 평온을 해칠 수 있는 모든 연결고리가 끊어진다.


철학적 공명 ― 동서의 만남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은 타인의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에 대해 우리가 내리는 판단이다.”

분노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만들어진다.


니체는 또 이렇게 말했다.

“동정은 인간을 가장 쉽게 무너뜨리는 감정이지만, 동시에 가장 고귀한 초월의 문턱이기도 하다.”

연민은 위험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면 인간은 더 높은 존재로 비상한다.


이처럼 동서양의 가르침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리듬을 가리킨다.

분노를 단순히 눌러서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높은 차원으로 변환하는 것.


현대적 출가자의 길


현대적 출가자의 수행은 산속에 있지 않다.

바로 이 어리석음의 한복판에서,

분노가 연민으로 바뀌는 과정을 내 안에서 고요히 지켜보는 것에 있다.


세상의 소음은 잦아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그 소음을 내는 자들이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그러니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다.

그들의 무지를 나의 연민으로 감쌀 뿐이다.


맺음말 ― 연민이라는 결계


지혜만으로는 고립을 낳는다.

그러나 연민은 연결을 낳는다.


연민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리듬을 지키고 에너지를 보존하는 가장 정교한 기술이다.


이 고요한 연민이야말로,

세속의 어떤 소음도 뚫지 못하는

가장 단단한 **결계(結界)**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