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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본질을 잡아먹는다

현대적 출가자

by 이선율


어느 날 지하철 플랫폼에서, 나는 한 남자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그의 몸은 단순히 살이 찐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였고, 그 존재감에는 어떤 ‘내면의 패배’가 어려 있었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는 지방에 묻힌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게 잡아먹힌 것이었다.


불교에서는 이를 **아귀(餓鬼)**라 부른다. 배는 끝없이 부풀어 있으나, 목구멍은 바늘구멍처럼 좁아 결코 채워지지 않는 존재. 그의 본질은 축소되어 어딘가에 웅크리고, 그 위로 욕망의 층위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당분, 기름, 짠맛, 타협, 무감각. 이제 그의 삶의 주인은 그 자신이 아니라, 그를 먹어치우는 욕망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음식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이는 권력에 먹힌다. 직함과 지위를 탐닉하다가, 어느 순간 권력 그 자체가 그를 삼켜버린다.

어떤 이는 인정에 먹힌다. 타인의 시선에 목매다 결국, 스스로를 그들의 평가에 저당잡힌다.

어떤 이는 피해자 역할에 먹힌다. “나는 피해자다”라는 자기 서사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그 고통 자체가 정체성이 된다.


욕망은 우리가 그것을 “이용한다”고 믿는 순간 이미 우리를 이용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게 먹히고 있다. 그 과정은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 “욕망은 충족되면 곧 새로운 결핍을 낳는다.” 결국 욕망은 결코 끝나지 않는 파동으로, 본질을 잠식하며 우리의 삶 전체를 집어삼킨다.


나는 그 남자를 보며, 이것이 단지 ‘타인의 이야기’가 아님을 직감했다. 지금 이 순간의 나 또한, 작은 골통 속의 개미처럼 어떤 탐닉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그 자각이, 출가자가 매일 반복해야 할 훈련이다.


그러므로 현대적 출가자는 욕망을 ‘이겨내려’ 하지 않는다. 지배하려는 의지 자체가 또 다른 욕망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출가자의 길은 다르다. 그것은 싸움이 아니라 **분리(Separation)**다.


그는 배고픔을 느낄 때, “나는 배고프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내 안에서 배고픔이라는 신호가 일어나고 있다”고 관찰한다.


분노가 일어날 때, “저 사람이 나를 화나게 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내 안에서 분노라는 파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그는 욕망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는 파도가 아니라, 파도를 바라보는 바다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자유다.

욕망에 먹히는 자는 끝없이 결핍을 좇다가 본질을 잃는다. 그러나 욕망을 관조하는 자는 그 파동을 고요히 품은 채, 자기 본질을 지켜낸다.


삶은 매 순간 유혹의 골통을 들이밀지만, 출가자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는 그저 파동을 바라보고, 본질을 지킨다. 그때 비로소 욕망은 나를 잡아먹을 수 없고, 나는 욕망을 넘어선 리듬으로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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