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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는 상(像)

현대적 출가자

by 이선율



헬스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여자를 보며, 내 안에서 거대한 파동이 일어났다. 반가움, 말 걸고 싶다는 충동, 늘씬한 다리를 향한 소유의 욕망. 그것은 단순한 시선이 아니라, 내 중심을 흔드는 +1의 요동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반응한 것은 그 여자가 아니라, **내 안에서 형성된 ‘상(像)’**이었다. 예쁘다, 매혹적이다, 갖고 싶다 ― 이 모든 평가는 눈앞의 실체가 아니라, 내 마음이 덧씌운 이미지였다. 여자의 육체가 요동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내 에고가 만든 환영이 나를 휘청이게 한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이 환영이 단지 성적 욕망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언젠가는 내 마음을 온전히 알아줄 친구 같은 여자가 나타나겠지.”
이 믿음 또한 같은 구조다. 겉으로는 순수한 갈망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이해받고 싶은 욕망이라는 다른 옷을 입은 파동일 뿐이다. 성적 환상과 정서적 환상, 두 얼굴을 가졌을 뿐, 뿌리는 같다.

현대적 출가자는 이 지점을 직시한다.
욕망을 부정하지도, 무리하게 끊어내려 하지도 않는다. 대신 이렇게 관조한다.

“아, 내 안에서 욕망이라는 요동이 일어나고 있구나.”

이것이 핵심이다.
‘나’와 욕망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 욕망은 나의 본질이 아니라, 내 안을 스쳐 지나가는 파동일 뿐이다. 파동은 잠시 크고 요란하게 일어나지만, 결국은 사라진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예쁘다, 이해받고 싶다, 소유하고 싶다 ― 이 파동은 언제든 다시 찾아온다. 출가자의 수행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언제든 휩쓸릴 수 있다는 리스크를 직시하며, 그럼에도 고요한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

여자라는 상像은 결국 외부에 있지 않다.
그것은 내 마음속 에고가 만든 환영이며, 요동의 한 형태일 뿐이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 한, 욕망은 더 이상 나를 집어삼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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