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던 어느 날, 예전에 근무하다 그만둔 데스크 아가씨가 놀러왔다. 순간 반가움이 밀려왔고, 괜히 말을 걸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녀의 늘씬한 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내 안에서 욕망이 꿈틀대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나는 스스로 ‘현대적 출가자’를 이야기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이런 장면 앞에서는 여전히 흔들린다. 결국 말은 걸지 않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요즘 어디 계세요?”라는 말을 꺼내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 마음속에서 여자를 둘러싼 수많은 **상(像)**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예쁘다, 못생겼다, 다리를 갖고 싶다, 만지고 싶다, 혹은 언젠가 내 마음을 알아줄 친구 같은 여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환상까지. 결국 이 모든 것은 실체가 아니라 요동의 파동일 뿐이다.
이 상像을 ‘하나의 요동’으로 명확히 규정하지 않는 이상, 나는 언제든 다시 휩쓸릴 수 있다. 여자의 얼굴이나 몸, 혹은 이해해줄 누군가라는 판타지가 내 마음을 점령하는 순간, 나는 본질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지 나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자라는 상像은 인간이라는 종이 피할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의 형태다. 우리는 모두 이 상像 앞에서 흔들린다.
현대적 출가자는 이 요동을 없애려 하지 않는다. 욕망을 부정하거나 억누르는 대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아, 내 안에서 또 하나의 상像이 작동하는구나.” 그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욕망은 더 이상 나를 삼키지 못한다.
그때 욕망은 족쇄가 아니라, 나를 깨우는 경종이 된다.
여자라는 상像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요동’으로 보고 흘려보낼 수 있다.
그 자유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쫓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