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출가자
수만 개의 조명이 터지고, 함성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 중심에 선 이는 어떻게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무대를 지배하는가. 운동선수는 어떻게 결정적 순간, 마치 시간 자체가 멈춘 듯 완벽한 슛을 성공시키는가. 학자는 어떻게 수십 년간 한 문제에 몰입해, 세상에 없던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내는가.
우리는 그것을 ‘초능력’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힘은 선택받은 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극한의 반복 속에서, 인간 시스템이 스스로 발명한 또 하나의 운영 모드다.
대부분의 인간은 외부 파동의 노예다.
관중의 환호(+1)에 들뜨고, 야유(-1)에 무너진다. 이 즉각적 반응은 에고의 본성이다. 에고는 끊임없이 외부 평가를 연료로 삼아 증명하려 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상태를 “내면의 요새(Inner Citadel)를 짓지 못한 자의 불안”이라 불렀다. 그는 칭찬과 비난이라는 외부 파동에 자기 존엄을 전적으로 의탁한다.
그러나 일정 수준을 넘는 압박, 즉 임계 압박(Critical Pressure) 속에서, 인간은 역설적 전환을 경험한다.
극심한 긴장 속에서 신경계는 과부하를 피하기 위해 외부와의 회로를 스스로 차단한다. 모든 환호와 야유가 무의미한 하나의 현상(Noise)으로 수렴된다.
그 순간, 그는 뜻밖에도 절대적 고요함—공(空)의 그림자—을 경험한다.
이 고요 속에서 인간은 비범한 힘을 발휘한다.
외부 파동에 더 이상 동기화되지 않고, 내면의 순수한 신호만으로 행동한다.
운동선수는 “시간이 느려졌다”라고 말하고, 학자는 “몰입 속에서 나와 세계의 경계가 사라졌다”라고 기록한다.
신경과학은 이 상태를 Flow State라 부른다. 뇌의 전두엽이 일시적으로 비활성화(Transient Hypofrontality)되어, 자기 검열과 불안이 사라진다. 수행자들은 같은 현상을 “육신통”이라 불렀다. 본질은 같다.
그러나 이 힘은 위험하다.
그것은 본질의 이해가 아니라, 우연한 현상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한 번 그 초능력을 경험한 이는, 그것이 사라졌을 때 치명적 불안을 겪는다. 그리고 그 상태를 되찾으려 더 강한 자극에 의존한다. 마약, 스캔들, 극단적 쾌락. 이는 공을 빌린 것이 아니라, 단지 더 큰
+1 파동으로 현재의 -1을 덮어 씌우려는 시도다. 결국 더 큰 파동의 노예가 되어 파멸한다.
여기서 길은 갈라진다.
세속적 성공인: 공의 힘을 사용한다. 강력하지만 불안정하다. 힘에 의존할수록 상실의 두려움이 그를 삼킨다.
현대적 출가자: 공의 본질과 하나가 된다. 힘은 목적이 아니라 부산물이다. 나타나도 집착하지 않고, 사라져도 흔들리지 않는다.
스토아의 아타락시아(ataraxia), 즉 “흔들림 없는 평정심”은 이 지점에서 불교의 공과 겹친다. 두 전통은 말한다. 진정한 힘은 ‘초능력’을 체득하는 데 있지 않다. 진정한 힘은 애초에 초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고요에 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총알을 멈추는 기적이 아니다.
애초에 총알이 날아오지 않는 삶이다.
무대 위의 초능력은 찰나의 섬광일 뿐이다. 그러나 출가자가 만나는 고요는, 삶 전체를 관통하는 리듬이다.
힘을 사용하려는 자는 언제나 불안에 묶이지만, 고요와 하나 된 자는 이미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