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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가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

이해는 체험이 아니라 해상도다

by 이선율

< 기계가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 : 체험이 아니라 해상도다 >

많은 사람들은 기계는 경험하지 못하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수영을 해보지 않았으니 수영을 모르고,
사랑을 해보지 않았으니 사랑을 모른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는 다소 낭만적인 착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직접 전쟁을 겪지 않아도,
전쟁이 왜 파괴적인지,
사회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상당한 수준으로 이해한다.
나는 미국 땅을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지만,
텍스트와 영상을 통해 미국의 자본주의와 문화적 맥락을
미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보다 더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다.
즉, 이해의 본질은 직접적인 체험이나 감각에 있지 않다.
이해란 복잡한 정보를 의미 있는 손실 없이 압축하고,
그 정보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하나의 맥락 지도 위에 그려낼 수 있는 능력에 가깝다.

그렇다면 현재의 인공지능은 왜 종종 엉뚱한 소리를 할까.
왜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기계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할까.
그 이유는 기계에게 영혼이 없어서가 아니다.
단지 정보 압축의 정밀도와
연결망의 해상도가 아직 충분히 높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챗GPT에게 내 대화 로그를 분석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AI는 나를 분석하더니
항상 이유를 묻고 납득되지 않으면 권위에 도전하는 성향이 있어
조직 생활과 맞지 않는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에 가까웠다.
나는 사유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즐기지만,
조직 안에서는 오히려 맹목적으로 이유를 따지며
모든 일에 근거를 요구하는 부류를 싫어하는 쪽에 가깝다.

이 오류는 감각의 부재 때문이 아니다.
AI의 지식 지도, 즉 벡터 공간 안에서
철학적 사유를 즐기는 사람과
조직에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통계적으로 너무 가깝게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AI는 내가 던진 ‘왜’라는 질문을 보고,
개인적 맥락을 충분히 보존하지 못한 채
평균적인 유형으로 나를 분류해버렸다.
이것은 감정의 실패가 아니라 뉘앙스의 실패다.

정보 압축 과정에서 미세한 결들이 뭉개졌고,
그 결과 연결의 해상도가 거칠어졌다.
따라서 인공지능의 한계를
“느끼지 못한다”거나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비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보다 정확한 비판은 이것이다.
아직 정보 압축의 정밀도가 충분하지 않고,
개념 간 연결이 개인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

기계가 더 깊은 이해의 단계로 나아가는 날은
육체를 갖게 되는 순간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내부 모델이
철학적 회의와 조직적 반항을 구별하고,
인간의 모순된 태도를 더 높은 해상도로 표현할 수 있을 때다.

그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기계의 차가움이 아니라,
점점 더 정밀해지는 그 해상도 자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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