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문 연습이었는데 알고보니 내 얘기
"저.. 혹시 박형철 선수 아니세요?"
취기를 나타내는 붉은 반점이 덕지덕지 차오른 손님이 물었다. 형철이 푹 눌러쓴 모자 왼쪽에는 '한화손해보험' 로고가 큼지막하게 써져있었다. 선수들만 쓸 수 있는 어쎈틱 모자였다. 옅은 미소를 지은 형철은 말없이 남은 치킨을 포장하는데 열중했다. 혹시 대꾸라도 했다간 팬이라며 내뱉는 온갖 야구 지식을 들어주느라 시간을 뺏기기 십상이었다.
"저 새끼 모른 척 하네? 선수 때 암 것도 없던 주제에.."
비닐봉지를 받아든 손님은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잠시 멈칫한 형철은 벨이 여러 번 울리자 언제 그랬냐는 다시 주문을 받기 위해 움직였다. 발이 안 보이도록.
"너 오늘부터 자유계약 선수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어느 팀이든 자유롭게 계약할 수 있다는 건 소속팀과의 관계가 마무리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방출 선수가 된 것이다.
"저 한 번만 더 기회 주시면 진짜 잘 할 수 있는데.."
"그럼 진작에 좀 잘하지 그랬냐?"
팀장은 애꿎은 서류 뭉치만 책상 위로 탁탁 털고 밖으로 나섰다. 방출 통보를 해야 할 선수는 형철 말고도 많았다. 홀로 남은 회의실엔 히터 소리만 감돌았다.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왔다. 아직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참지 못한 형철은 펑펑 눈물을 흘렸다.
형철은 야구가 더 하고 싶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해온 게 야구뿐이기 때문이었다. 운동을 계속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자신이 있었다. 우선 찾아간 곳은 고등학교 운동장이었다. 말 그대로 자유계약 선수인 만큼, 어느 팀이든 불러도 갈 몸 상태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열 살도 넘게 차이나는 후배들과 캐치볼을 하고 러닝 훈련을 했다. 허나 오래가진 못했다. 너 때문에 우리 아들 야구 못하는 것 아니냐는 학부모들의 불만이 속출한 탓이었다. 다른 학교로 옮겨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학부모 민원이 제기되긴 마찬가지였다.
진짜 방망이를 놓게 만든 계기는 하나 더 있었다. 그거 너 욕심 아니냐는 주변의 말 한마디들. 그제야 한 해 전 결혼한 아내가 보였다.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자줏빛 물이 다 빠진 코트와 소매가 너덜너덜해진 폴라티를 몇 년째 입고 있었다. 보호대 사느라 정작 사랑하는 사람 옷 살 생각을 못한 것이었다. 결국 자동차와 야구용품을 팔고 치킨집을 차렸다.
“또래오래 치킨입니다”
“이대로 그만두긴 아깝지 않냐. 테스트 자리라도 알아봐줄게. 어때?”
야신으로 유명한 옛 스승의 전화였다. 형철은 자신의 배를 봐라봤다. 펌프질을 한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있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 운동선수였다는 게 믿기 힘든 몸이었다. 손님들이 남긴 치킨으로 끼니를 때우고, 자신을 알아봐준 이들이 따라주는 맥주를 마셨던 게 이제야 떠올랐다. 함께 서빙을 하는 아내를 홀로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그토록 원하던 그라운드로 가기엔 늦어도 너무 늦은 것이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는 마무리되어야 했다.
손님이 다 떠난 새벽, 형철은 매장 냉장고에 소주를 꺼내 잔에 따랐다. TV를 켰다. 하루 동안 있었던 야구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모은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다섯 걸음이면 닿을 모니터와의 거리. 허나 이젠 영영 닿을 수 없는 까마득한 세계였다.
그토록 좋아하던 야구를 왜 더 좋아하지 못했을까. 홀짝홀짝 술을 마시는 형철의 눈엔 눈물이 고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