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도 일이 되면
지난주 금요일, 공부를 하려고 일찍 일어났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틀 전 거절한 20만원짜리 게임테스트 알바가 자꾸 머릿속을 맴돈 까닭이다. 그 20만원이 있으면 내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언론고시반 수업이 뭐라고 내가 그걸 '깐 걸까' 라는 생각이 나를 옥죄었다.
더구나 수업 전날임에도 고시반 수업 과제는 공지되지 않았다. 내 사정을 모를 선생님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 지경이었다. 그러다 잠이 들어버렸다.
위~잉. 잠든 지 10분 만에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3초간 울리는 게 전화가 왔다는 신호였다. 안 받고 잠에 집중하려다, 혹시 싶어 번호를 슬쩍 봤다. '02-2088' 엊그제 봤던 번호였다.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 여성의 목소리는 반옥타브 정도 침울해 있었다. 모집 인원이 아직 다 안 차서 전화를 드렸다고, 적지 않은 금액인데 주말에 참여하셔서 받아가는 게 어떠냐는 말을 애원하듯 건넸다.
고민 따위 할 겨를이 없었다. 어서 그의 말이 끝나, 곧장 참여 의사를 표하고픈 심정이었다. 서로 감사하다는 말을 연거푸 주고받으며 통화는 끝났다. 그러고 10분이 지나니 카톡방에 수업 과제가 올라왔다. 참 인생 기묘하구나. 허탈함이 밀려왔다.
주말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20만원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니 절로 눈이 떠졌다. 담당자가 확인 문자메시지 하나 보내달라는데, 콧방귀가 나올 정도였다. 50분 동안 지하철을 타고 20분을 걸어, 판교의 한 게임회사 사옥에 도착했다.
담당자는 기본요금 밖에 안 나오고 교통비를 주니 택시를 타고 오라고 했지만, 그 택시비라도 아끼고 싶었다. 6000원이면 무려 한 끼 식사가격인데!
60명 정도 수용 가능한 강의실로 들어가니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두 분께서 신원 확인과 안내를 맡았다. 강의실은 반 정도 찼는데 벌써 홀아비 냄새가 코를 찌를 지경이었다. 지금와서 보니 그게 복선이었다. 다들 핸드폰 페이스북과 유튜브를 번갈아 들어가면서 무료함을 달래려 애썼다. 전날 담당자가 "지루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5분 만에 지루해질 줄은 몰랐다.
인원이 다 모이니 접수를 담당했던 아주머니께서 커다란 가방을 들고 돌아다니셨다. 토익 시험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마트폰 보관함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들 핸드폰을 반납하는데,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7시간을 핸드폰 없이 버텨야 한다니. 역시 괜히 20만원이나 주는 게 아니었다.
핸드폰 제출 후 컴퓨터실로 이동했다. 50명의 사내들이 삭막하게 움직이는 광경이 어디서 많이 본 듯했다. 6개월 전 받은 예비군 훈련이 떠올랐다. 그 지루함을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오작동하는 컴퓨터가 있어 인원을 재배치하느라 30분, 게임테스트를 설명하는데 30분이 흘렀다. 그럼에도 6시간이 남았고, 다음날에도 똑같은 하루를 보내야 한다.
테스트 요지는 간단했다. 한 축구게임이 새로운 모드를 내놓을 계획인데, 여기 모인 50명의 사내가 직접 게임을 해보면서 설문에 응하는 것이었다. 게임 모드는 6가지 종류가 있고, 종류별로 1대1, 2대2, 3대3으로 나눠서 3판씩 주말 동안 플레이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때는 감이 안 왔다. 토요일 하루에만 27판의 게임을 해야 한다는 게. 그저 '게임만 했는데 20만원이라니 개이득이구만!'이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지루한 게임 설명을 마치고 드디어 본격적인 테스트가 시작됐다. 평소에 즐겨하던 게임이니 처음 몇 판은 되게 재밌었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니, 내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연달아 져서 화가 또 머리끝까지 난 탓이었다. 돌아보니 여기모인 사람들 모두 얼굴에 홍조가 가득했다. 아, 패배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사례비가 높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었다. 아무리 게임도 2시간 가까이 하니 슬슬 지루함이 몰려왔다. 첫 모드 9판, 한 판에 대략 10분 걸리니 1시간 30분, 을 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으니, 이제 슬슬 집에 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허나 아직 18판이 남아있었다. 다시 게임을 재개하겠다고 안내하는데, 모두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남은 18판은 지루함의 결정판이었다. 어렸을 때는 밤새 했던 그 게임인데, 지금처럼 했으면 내가 게임을 끊고 공부에 매진해서 서울대에 갔겠구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동안 '게임을 시작한지 0시간 경과했습니다. 과도한 게임 이용은 건강에 지장을 줄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무시했었는데, 그 폐해와 심각성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7시간 경과 문구까지 뜨고서야 토요일 일정이 마무리 됐다. 서울로 올라가는데 자꾸 눈앞에서 축구공이 보이는 듯했다.
일요일은 다행히 6판 줄어 21판만 하면 됐다. 아침에 모인 50명의 사내들은 하나 같이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생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주구장창 게임만 종일했다. 마지막 6판을 남긴 쉬는 시간에 대기실에 갔는데, 안내하시는 아주머니께서 "이제 마지막 모드니 좀만 더 힘내자"고 말씀을 하셨다. 나도 모르게 "와.. 게임도 돈 벌려고 하니까 영 힘드네요"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아주머니께서 호탕하게 웃음을 지으셨다. 그렇다. 돈 벌려고 주말에 모두들 나와 게임을 하고, 게임테스트를 진행하고, 행사 안내를 했다. 그 지루함이 끝을 보일 때쯤에야 우리는 솔직해질 수 있었다.
마지막 6판을 하는데 행사를 진행한 직원은 퀸의 'Live Aid' 공연 음원을 틀었다. 아침에 모였는데 벌써 어둠은 다가오고, 긴 주말의 끝이 보이면서 '보헤미안 랩소디'까지 컴퓨터실에 울려 퍼지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전 직장에서 욕 처먹으면서 일할 때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때문에 게임에 집중이 안 돼 연거푸 골을 먹었다.
드디어 테스트를 모두 마치고 사례비를 받을 시간. 대기실 앞에서 다들 질서정연하게 줄을 섰다. 봉투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안을 펼쳐보며 금액을 확인했다. 드디어 내 차례도 돌아왔다. 나 역시도 봉투를 받자, 입구를 동그랗게 오므리고 액수를 살펴봤다. 혹시나 실수로 돈이 더 들어있길 바랬지만, 아무리 세어봐도 20만5천원이었다. 다들 실수로라도 돈이 더 들어있길 바랬을 것이다. 나처럼.
개인적으로는 노동이란 말을 싫어한다. 그냥 다 먹고 살려고 일을 하고, 구차하게 사는 건데 '노동'이란 단어는 어딘지 모르게 낯간지러웠다 스스로. 허나 돈이 담긴 봉투를 주머니에 넣고 판교역을 향해 다시 걸어가는데, 이번만큼은 게임 노동을 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게임이라는 이 유해한 것을, 단순 노동이라는 이 지루한 것을, 주말 종일 근무라는 이 빡치는 것을 견디며 받아낸 돈이니까. 돈 번다는 것이 참 쉽지 않음을 오랜만에 느낀 날이었다.
힘들게 번 20만원은 하루 만에 다 써버렸다. 우선 여자친구와 초밥을 먹었다. 오랜 만에 밥 사주는 남자친구가 되고 싶었다. 요 근래 스시 오마카세 후기를 보며 굶주림을 달랬기에, 그런 비싼 물고기들을 먹고 싶었지만, 2만7500원 짜리 은행골 초밥으로 갈음했다. 더 맛난 것을 못 사줬다는 기분 탓일까. 꿀맛이 아니었다.
남은 돈으로는 언론사 입사 수업을 등록했다. 지난 번 글을 쓰다가 아카데미 홈페이지를 들어갔고, 유력 언론사 현직자 수업이 4회에 16만원이었다. 오 싸네? 하면서 바로 등록을 해버렸다. 20만원을 쥐고 있다는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결제를 하니 20만원은 증발하고 말았다. 다시 몇 시간 동안 알바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밥 한 끼, 나에 대한 투자를 위해서라면 어떤 알바든 할 수 있다. 물론 막상 할 때는 생각이 바뀌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