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8-글감

스스로 오는 게 아니라 직접 찾아야 하는 것

by 송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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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은 스스로 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직접 찾아야 하는 것"

시를 어떻게 써야하냐는 주인공 미자의 질문에 김용탁 시인은 답한다. 가히 우문현답이다. 이 말을 들은 65세 미자는 시상을 찾기 위해 동네 구석구석을 살핀다. 꽃도 유심히 살펴보고, 주변 풍경도 관찰해보지만 마땅한 시상은 나오지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애지중지 키우던 외손자가 집단 성폭행에 가담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미자는 실마리를 풀어간다. 시상은 치부와 속죄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아침에 문득 영화 <시>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요즘 글이 안 써져 한숨이 늘었던 탓이다. 나에게 글쓰기는 취미이면서 합격을 위한 수단이다. 채용 과정은 대략 이렇다. 3~400명이 빽빽하게 한 학교를 가득 채운다. 감독관은 A3 용지 크기의 답안지를 나눠준다. 이어 칠판에 논제를 적는다.


최근 치렀던 시험 논제는 이랬다.

Q1. "대한민국 법조문에 단 한 줄의 조항만 존재해야 한다면, 그 조항은 무엇인가?"

Q2. "나에게 3일간 '특별한'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 여행이 왜 특별한가? 자유롭게 쓰시오."


출제자들도 쉬이 쓰지 못하는 주제들을 한 시간 남짓한 동안 써야한다. 당장 떠올리기 쉽지 않다. 평소에 미리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른바 총알. 그 한 발 명중을 위해 많은 지망생들은 스터디를 하거나 큰돈을 내고 현직자 수업을 듣는다.


역으로 평가자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앞에 놓인 최소 수십에서 수백 장의 답안지를 세세히 읽을 여유 따위는 없다. 찰나의 순간에 "오 괜찮네?" 싶은 글들만 간택 받는 셈. 그렇게 10% 정도의 글만 추려지고, 작성자에겐 면접 기회를 제공한다. 바늘구멍 같은 면접을 통과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고.


글의 시작은 역시나 글감이다. 그 수많은 작문 중 눈에 띌 글감을 찾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사람 많은 광장으로 가 다양한 군상을 관찰하고 특이한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또 영화나 책을 찾아보고. 하지만 요즘 맘에 드는 글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있던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니 식상했고, 방금 떠오른 소재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상상의 나래로 '갈기니' 너무도 엉성했다. 시험 날은 점점 다가오는데 하루가 정말 피가 말리는 기분이었다.


고통에 신음하던 어제 저녁, 요즘의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겼나 기록을 살펴봤다. 동시에 생각해봤다. 딱 하나의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면 어떤 글을 택할 것인가.


지금 기준으로는 인턴 시절 썼던 글을 보여줄 것 같다. 비록 떨어져서 많이 창피하지만, 당시 글들만큼 맘에 드는 게 없다. 그때 내게 글쓰기는 울분이었다. 매일 고객들한테 거절당하며 밥벌이의 무게를 느꼈고, 콧대만 높았던 나 자신의 위치도 알게 되었다. 하루하루 맺힌 한을 풀어야 만 잠에 들 수 있어서 키보드로 '급발진'을 했다. 지금 돌아보니 부끄럽긴 하지만 이토록 생생하게 또 쓸 수 있을까 싶다. 글 쓸 시간이 많아진 지금은 할 이야기가 없어 밀린 숙제하듯 끄적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감히 깨닫는다. 글을 고통 속에서 쓰여진다는 것을. 마냥 글감이 찾아오길 바라는 건 몹쓸 짓이라는 것을. 돌아보면 필기 합격 글도 그랬다. 몸소 느꼈던 고난의 기억을 끄집어 내 재조립한 글들이 스스로도 맘에 들었고, 평가자에게도 통했다. 앉아서 글감이 굴러 떨어지길 기다렸던 요 근래가 후회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지금 고통 받으러 밖에 나갈 수도 없고. 고민이다. 진짜 잘 쓰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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