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5-갈증

내가 할 수 있는 것

by 송사리

"선배, 갈증나요."

"응? 포카리 사먹어."


12월 4일 아침, 후배와의 대화다. 갈증. 그 두 글자의 의미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교과서에서만 봤던 계엄이란 단어가 2024년에 내려지고, 국회에 군인들이 총을 들고 찾아가는 말이 안 되는 광경. 그 역사적 순간을 우리도 유튜브로 지켜봤고, 네이버에 속속 올라오는 기사들을 확인했고, 때로는 확인되지 않은 '받글'을 여기저기 카톡방에 뿌리며 긴 밤을 지샜다.


art_1733274022.jpg 9개 종합일간지의 1면 모음. 출처 : 기자협회보.

그래도 명색이 기자인데. 그날 밤 나도, 후배도 할 수 있는 것은 딱히 없었다.


그런 후배에게 이온음료 소리나 내뱉는 내가 너무나 추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상황에 '내가 일을 안 해도 되어서' 다행이다는 생각도 했다. 두서 없는 현장에 다짜고짜 투입돼 타사 동료들이랑 치이고, 엇갈리는 지시에 속만 타들어가고, 쫓기는 시간에 똥줄만 타고. 좋은 소리는 하나도 못 듣는 취재 현장에 대한 거부감부터 스멀스멀 올라왔기 때문이다. 역사적 순간에 내가 있어야 한다는 야망보다는, 투입한 노동력 대비 대가부터 계산하는 월급쟁이가 되어있었다.


계엄 선포 이후 일주일간 "요즘 바쁘시죠?"란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때 마다 사람 좋은 미소로 손을 저었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진짜였기 때문이다. 정치 이슈가 모든 사회 현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 정치, 사회 출입기자들은 그야말로 쉬지도 못하고 노동력을 갈아넣고 있었고, 몸담고 있는 분야는 있는 행사들마저 하나둘 급히 취소됐다. 어쨌든 매일매일 신문 지면을 채워야 하는 입장에선 이만큼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뭘을 써야할까 홈페이지를 여기저기 뒤지던 도중, 국회에서 한 행사를 발견했다. 1인 중증장애인기업 업무지원제도 활성화를 위한 정책 토론회. 행사명보다는 참석자 명단에 포함된 출입처 과장님이 더 눈에 띄었다. 찾아가서 일단 울먹이면 뭐라도 하나 주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국회를 찾았다.


토론회에서 힌 의원님이 목소리를 높이는 걸 보고서야, 국정감사 때 이 현안이 다뤄졌던 것이 떠올랐다. 현실적으로 장애인기업까지 다루기에는 한계도 있고, 회사도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부분이다 보니 그냥 지나쳤었다. 하지만 바쁘신 의원님은 세 달이 지나도 매달리고 있었다.


업무지원제도는 1인 중중장애인기업에 활동지원사를 배치해 업무보조, 의사소통, 경영지도 등 효율적인 사업 운영을 돕는 제도다. 이전까지 정부의 중증장애인 활동 지원제도는 일상생활만 적용되고, 생업을 돕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했다. 이로 인해 홀로 안마원을 운영하던 시각장애인이 예약 접수와 결제 업무 등에 활동지원사 도움을 받았단 이유로 부정수급자로 몰렸다. 환수금은 무려 2억원이었고, 이 장애인을 부당함을 호소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법 개정이 이뤄지고 올해 2억원 규모의 시범사업을 운영했는데, 내년 예산이 편성되지 않았다. 증액심사 없이 국회 예산안 통과. 올해는 그나마 41명에게 활동지원사가 배정됐는데, 내년에는 어느 누구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 그래서 의원님은 장관을 다그쳤고, 살벌한 시국에도 간담회 개최를 강행한 것이었다.


쪽팔렸다. 정부의 무관심으로 사람이 죽었는데, 나 역시도 관심이 없어 잘 모르고 있었다. 계엄 사태 취재는 내 영역 밖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핑계라도 댈 수 있지만, 장애인기업은 엄연히 내 취재 영역이었다. 심지어 국회의원의 호통을 보고도 그냥 넘어갔다. 정말 현장의 절실한 목소리를 들으려는 노력도 안 했는데, 감히 기자 명함을 파고 돌아다닐 수가 있느냐.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이제라도 뭐라도 해야했다. 내년 예산이 반영되지 않아 1인 중증장애인 기업이 어려움에 처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조금이나마 관심을 받게 하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토론회에서 받은 자료집을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읽고, 최대한 고민하며 기사를 적어내려갔다.


그렇게 기사는 완성됐고, 다행히 지면에 바로 배정됐다. 이번만큼은 회사가 선호하는 기사보다는 내가 쓰고 싶은 기사를 써보겠다는 의지가 강했는데, 어느 정도는 뜻이 통한 것이다. 이보다 기분 좋은 일이 어디있을까. 나 역시도 갈증이 무지 나던 때였는데, 조금이나마 해소했다는 뿌듯함이 들었다.


기사가 나가고 한 시간 뒤에 토론회를 함께 개최한 다른 의원실에서 메일이 왔다. 오 내 기사를 누군가 읽어주다니! 설레는 마음으로내용을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기자님. 업무지원인 현안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만, 오늘 11일 장애예산관련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습니다.

과거 예약을 해두었으나, 취소하여 개최하지 않았으니...(하략)"


기사 말미에 다른 의원도 기자회견을 열고 관심을 촉구했다고 마무리했는데, 예약을 취소했다고 한다. 틀린 사실을 기사에 쓴 것이다. 다급하게 부장에게 카톡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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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조져지는 건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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