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3-특실

별거없더라

by 송사리

갑작스럽게 잡힌 당일치기 대구 출장. 간만에 서울을 떠난다는 설렘은 점점 가기 귀찮다는 투정으로 변해갔다. 만나려는 업체의 연락이 오질 않아 "설마 안 가도 되는 걸까?"란 잔꾀를 부리려는 찰나, 담당자는 귀신 같이 기차표를 전달했다. 빼도 박도 못하고 대구를 다녀와야 한다. 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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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열차 출발 시간은 오전 7시. 안 그래도 툭 튀어나온 입이 앞으로 더 돌출되려고 했다. 그러다 좌측 하단에 작게 써진 '특실' 두 글자를 발견. 화가 누그러졌다. 아니 입 꼬리가 올라갔다. 와, 나도 드디어 특실을 타보는구나! 글 쓸 거리 하나 생겼다!


서른이 넘도록 특실을 타본 적이 없었기에, 내게 그곳은 미지의 세계였다. 아니 권위의 세계다. 비행기만 해도 일등석, 비즈니스석 사람들만 먼저 탈 수 있다. 공간은 분리됐고 서비스 질 역시 다르다, 고 유튜브에서 봤다. 어찌됐든 아무나 탈 수 없는 공간인 것은 사실. 내가 특실을 탈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 사회적 신분이 한 단계 상승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머니, 저 이렇게 성공했습니다!"


출발 시각이 오전 7시라는 점은 여전히 마음을 무겁게 했다. 열차시간에 맞춰 하루를 시작하려면 보통 이런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는가.


"7시 출발이니까, 6시 40분쯤에는 서울역에 도착해야겠네?"→"그럼 6시 30분에 도착한다 생각하고 알람 맞추자!"→"흠.. 열차를 놓치면 안 되니까 알람을 촘촘하게 맞춰야겠지?"→"지하철도 자주 다니는 시간이 아니니까 좀 일찍 알람을 맞추자!"


그렇게 새벽 4시 30분부터 3분 간격으로 알람을 맞췄다. 전날 과음하고 늦게 집에 들어온 탓에 딱 두 시간 잤다. 그것도 불안해서 방에 불 켜고.


우려했던 대로 새벽 6시 20분 서울역 도착. 퀭한 몰골로 하염없이 기차를 기다리는 인물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열차를 기다리는 이유는 딱 하나. 특실 타봐야 하니까. 내 기어코 특실의 A부터 Z까지 모두 달달 외워 기록으로 남기리라. 특실에 탄다고 생각하니 왠지 어깨도 확 펴게 되고, 걸음걸이도 당당해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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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면 특실 첨 타봐서 호들갑 떠는 사람처럼 보일까봐 셔터 소리 막고 후다닥 찍었다. 확실히 널찍했다. KTX 일반실 좌석이 18열까지 있다면, 특실은 12열까지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단순 계산하면 1.5배 공간이 여유로운 셈.


그게 다였다. 나머지는 우리가 보통 타는 일반석 좌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서 한숨이라도 자려고 눈을 감았다. 순간, 이슬아 작가의 <상인들>이 떠올랐다.



“언니, 저는 돈 때문에 누드모델을 해요. 그려지는 게 황홀해서 누드모델이 되기도 하고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간 때문에 누드모델을 해요. 내 마음대로 시간을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 중 하나잖아요. 일하고 싶을 때만 일해도 생활비를 벌 수 있으니까.”


긴 머리의 언니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시간이 제일 비싸다는 거, 알고 있구나.”


저는 진작 알았다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상인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빌딩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자동차를 가진 사람도 아닌, 시간을 가진 상인이라는 사실을 그때 막 실감했습니다. 시급 3만원짜리 모델들. 비참한 마음 없이 벗은 몸을 팔 수 있는 상인들. 우리는 서로에게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이슬아 <상인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6/0000030870?sid=110)>



사람들이 특실을 타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다. 특실을 탄다고 해서 일반실보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저 널찍한 공간과 신문, 생수 등이 주어질 뿐. 그 몇 가지 차이로 우리는 서로의 등급을 나누어버린다. 그럴 만큼 이 특실이란 공간이 가치 있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최소 비용에 모든 것을 맞추던 내 자신도 돌아봤다. 정 급한 일이 아니라면 KTX 대신에 무궁화호, 우등버스보다는 일반고속버스를 타는 게 일상이었다. 가능한 저렴하게 목적을 달성하는 게 당연한 원칙이었고, 그 과정에서 나를 희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여겨왔다.


내가 탔던 열치 특실은 만석이었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공간의 편리와 서비스에 돈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이제야 특실을 타게 된 사실이 과연 자랑스러워 할 일일까. 호들갑을 떨고 있다는 것은 내가 내 스스로를 아끼지 않았다는 방증 아닐까. 반대되는 두 가지 생각이 기차 안에서 내내 교차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굉장히 불편한 출장 여정이었다. 제일 앞좌석에 앉았기 때문. 동대구까지 몇 개역 되지도 않는데,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은 어찌나 많은지. 문 여닫는 소리 때문에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올라오는 길에는 동대구역에서 수원역까지 쉬지 않고 통화하는 사람도 있더라. 내용상 업무 연락이고 딴에는 밖에 나가서 통화하는 배려를 보였지만, 소리가 객실에 다 들려왔다. 좌석 값을 하나도 못한 셈이다.


앞으로 내가 또 특실을 탈 일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내 돈 내는 일이면 잘 안 타겠지. 다만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는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살다보면 뭐 특실 탈 수도 있지.


내가 나를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뀔 수 있음을 깨달은 게 출장 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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