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쳐맞기 전까지는.
"송사리야, 엄마 제주도 다녀오려고 하는데.."
외할머니, 막내이모와 함께 탈 비행기 표 좀 끊어달라는 부탁. 겉으론 귀찮은 내색을 보였지만 속으론 쾌재를 불렀다. 제발 혼자 살아보고 싶다고 그동안 노래에 노래를 부르지 않았나. 심지어 평일에 이틀이나 자리를 비운다니. 내 돈으로 표를 사주고픈 심정이었다.
그리고 지난 화요일, 엄마는 할머니와 이모를 데리고 제주도로 떠났다. 드디어 나만의 2박 3일 시작.
빈집.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여자친구였다. 물론 4년 반 넘게 만나면서 함께 밤을 보낸 시간이 더러 존재한다. 하지만 둘 다 본가에서 지내는 탓에 제3지대를 항상 찾아다녀야 했다. 낯선 곳보다는 서로의 일상을 공유해보는 것도 뜻 깊지 않을까. 마치 <연애의 온도>에서 김민희와 이민기가 알콩달콩 지내는 것처럼.
하지만 내가 이민기가 될 수 없듯, 우리 인생도 영화 같을 수는 없었다. 여자친구에게 급히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오랜 시간 이날만을 기다린 만큼 허탈함은 당연히 컸다. 갑자기 일이 생긴 여자친구 상황을 이해는 하지만, '읽씹'으로 괜히 서운한 티를 내고 말았다.
정작 나도 화요일 당직 근무를 서게 되어버렸다. 민망하게 시리. 저녁 약속이 생긴 선배가 당직 바꿔줄 수 있냐는데, 밥값 못하는 '쪼랩'이 어찌 거절하리오. 다들 내가 엄마의 여행만 기다렸다는 걸 알고 일부러 그러는 걸까. 잠깐 의심이 들었다.
평소 퇴근 시간은 18시 전후. 당직을 마치면 최소 20시 반. 집까지는 대략 1시간 소요. 보통 아침 6시 반에 일어나니까 딱 2시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당직을 서면서 그 잠깐이라도 어떻게 해야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 궁리를 했다.
응. 술상만 알차게 깔았다. 피자, 감바스, 훈제오리 등 종류별로 원 없이 모아서. 엄마 전용공간이던 거실을 차지하는 것만큼 빈집을 알차게 쓰는 방법이 없다. 때마침 야구 막바지 중계를 보면서 술을 술술 넘겼다.
핑계를 대자면, 말 그대로 만약을 대비해야 하는 당직을 서면 여러모로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각성 상태가 집에 와서도 지속된다. 그날 유독 일이 많기도 했고. 맥주 마시면서 기분 푸는 게 언제부턴가 삶의 낙이 되어버렸다. 엄마 눈치 안 보면서.
문제는 다음 날도 술상을 깔았다는 점. 창피해서 술병 사진은 못 올리겠다. 그냥 이대로 홀로 집에 남겨진 이틀을 보내기 아까웠다. 저녁이라도 맛난 것 먹어야지. 근데 고기를 앞에 두고 어떻게 물만 마실 수 있겠는가. 술을 곁들여야지.
그렇게 혼술을 들이키니 시간이 후딱 가버렸다. 너무 빨리 가서 증거 인멸 수단인 분리수거도 못했다.
다음 날 회사에서 된통 깨지고 말았다. 요근래 일을 대충, 허둥지둥하는 게 쌓였기 때문. 사실 저 갈비를 먹은 날도 처리해야 할 잔업이 좀 남아있었다. 단지 일만 하면서 황금 같은 저녁을 보내기 아까워서 안 했을 뿐. 그 대가로 주말에는 공부 좀 하라는 핀잔을 들었다.
그래서 주말엔 진짜 농땡이 안치고 일만 하면서 보냈는데 표가 안 난다. 방에 CCTV 달아서 보여줄 수도 없고.
조금은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고 싶을 때 일 생각이 졸졸 따라와 스트레스 받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직장인 송사리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 그러니 이도저도 아닌 불만족 상태로 스스로만 피폐해졌던 것.
당장은 먹고 사는 게 우선. 윗사람들에게 당당해질 수 있을 만큼의 노력은 해야겠다. 그 떳떳함이 자아로 돌아와 행복을 안겨주겠지. 그냥 억울하다고 술만 마시면서 흐리멍텅해지지 말자. 빈집에서 이틀을 보내며 얻은 교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