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27-혜옥이

가장 솔직할 수 없는 게 가족 아닌가요?

by 송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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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날 너무 사랑해서 하는 행동이라지만, 제발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나 몰래 내 사주 보러 다니기다.


물론 나도 양띠, 사자자리의 일간/주간/월간 운세를 쉴새없이 확인하고, 불길한 징조에는 누구보다 가슴을 졸인다. 다만 이건 내가 내 인생을 살펴보는 것이지 않나. 아무리 가족이지만 엄마가 내 결혼, 구직 등이 순탄하게 풀릴지 알아보는 것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ㅜ


내가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는 분기에 한번, 못해도 반기에 한 번씩은 용하다는 곳을 찾아 내 사주를 보고 왔다. 안산, 속초 등 가깝지도 않은 곳으로만. 사주를 보고 나면 엄마는 꼭 "물을 조심해야 한다" "차를 조심해야 한다" 등의 말을 영험하게 건넸다. 아니, 당연히 조심해야 하는 것들이잖아. 이걸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전해야 한다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저 조언이 신경 쓰여 될 것도 안 될 것만 같았다. "사리야, 욱하는 걸 줄여야지 앞으로 잘된단다"는 말을 들었을 땐, 되레 엄마에게 욱할 뻔 했다.


나 스스로 인생이 안 풀린다고 느끼던 스물아홉의 어느 날에는 뒷목을 잡았다. 수도 없이 합격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이유가 이름 때문이란 이야기를 듣고 온 것. 항렬로 들어간 이름에 불 화(火)가 두 개가 들어가는데, 이 한자가 내 기운을 꽉 틀어막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엄마는 꽤 진지하게 개명할 생각이 없는지 물었다.


아니, 엄마랑 아빠가 지어준 이름이잖아? 이제 와서 그 이름 때문에 내 팔자가 어긋났다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무리 면접에 떨어져도 나는 내 노력의 부족을 원망했지, 애꿏은 이름을 탓할 수는 없었다. 아니 송사리라는 이름으로 기필코 성공하겠다는 오기만 불타올랐다.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엄마 역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금빛 상장 케이스를 내미는 것이다. 보통이면 표창장, 임명장 등이 있어야 할 속지에는 앞으로 '지안'이라는 이름으로 살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름을 '받아온 것'이다. 여기에 돈은 또 얼마나 들었을까.


곁눈질로 내용을 파악한 나는 작명소 서류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물론 엄마 말을 듣고, 정말 내 이름이 문제가 아닐까 생각을 잠시 하긴 했다. 지안이라는 이름이 송사리보다는 이쁘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름 바꾸기가 꺼려진 것은 귀찮아서다. 신분증 다 재발급 받아야 하고, 당장 포털사이트 이용부터 개명에 따른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들었다. 당시에는 취업준비생 신분이다 보니, 혹시나 전형 도중 바뀐 이름 때문에 일이 꼬이면 어떡하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송사리 이름으로 반드시 해내겠다는 의지도 컸고. 하도 싫다고 하니 엄마도 더는 내 앞에서 개명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다.


그래서 개명은 큰돈만 날린 일종의 해프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엄마의 핸드폰을 살펴볼 일이 있었다. 은행 공인인증서 갱신을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는데, 엄마는 주변 사람과 어떤 대화를 주고받는지 호기심이 생겼다. 엄마가 방심한 틈을 타 카톡에 들어가봤다.


아니, 내 전화번호를 지안이라는 이름으로 저장해놓은 것 아닌가. 분명 내 프사가 맞았고, 대화내용도 실제 나와 주고받은 것도 맞았다. 아들이 하도 싫어하니 개명 절차를 밟을 수는 없고, 엄마 혼자서는 나를 지안이라고 생각하고 또 실제로 호칭을 쓰고 있던 셈. 아들 잘 되겠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못 본 척하고 핸드폰을 엄마에게 건넸다.


65a467e0e9d5de2ff1ac590ff26c27428d930bff 출처 영화 <혜옥이>

이런 경험을 가진 내게 영화 <혜옥이>는 너무 내 이야기 같아 보는 내내 괴로웠던 몇 안 되는 작품이다. 고려대를 나온 라엘은 행정고시 준비를 위해 신림동 고시촌에 입성한다. 멋진 공직 생활을 꿈꾸며 고시 공부에 매진하지만, 번번이 낙방한다. 분명 누구보다 노력했는데 합격은 함께 공부한 동료들의 몫. 여기에 몸까지 안 좋아지며 라엘이는 점점 작아져간다. 엄마한테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이실직고할 정도로.


라엘의 합격만을 기다리며 모든 걸 희생한 엄마는 돌돌 말린 고급진 한지를 내민다. 역시 이름이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스님으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받아온 것이다. 나와 달리 라엘은 '혜옥'이라는 이름을 수용한다.


e91fbcfda7c535c706e15e36824314e28ca486da 출처 영화 <혜옥이>

어느 날 혜옥은 매몰 비용 개념을 들며 포기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인강 강사에게 자극 받았는데, 엄마로부터 개명 절차가 완료됐다는 전화를 받는다. 혜옥은 수화기 너머 엄마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걱정 안 해도 돼 엄마. 절대 포기 안 해. 보여줄 꺼야. 죽어라 할 꺼야. 절대 포기 안 해."


돌아온 대답이 너무 슬프다.


"어머머. 개명한 게 벌써부터 효과가 있구나. 호호호. 그래 혜옥아 너 다시 태어난 거야."


엄마의 커진 기대감은 결과적으로 혜옥에게 독이 된다. 더 이야기하면 스포 같으니 멈춰야겠다. 원 없이 울고 싶은 날이 있다면, <혜옥이>를 꼭 한번 볼 것을 추천한다.


eb163a2ff7ee04bebb5b77cf026d990afbce6263 출처 영화 <혜옥이>

"가장 솔직할 수 없는 게 가족 아닌가요?"


결이 다르지만 <혜옥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속시원하게 사연을 이야기해보라는 알바 사장님 말에, 혜옥은 퉁명하게 답한다.


수도 없이 떨어져 힘들어도 (내 딴에는) 티를 못 내고, 방송국이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손 놓고 싶어도 엄마한테는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긴 시간이 생각났다. 아들 잘 될 거라 믿고 혼자서 생계를 이어나가는 엄마를 어찌 실망시킬 수 있을까. 괜히 짜증내고 엄마의 관심을 거절하기 바빴다. 솔직하지 못한 건 직장인이 된 지금도 여전하다. 아들 우여곡절 끝에 기자됐다고 주변에 자랑하는데,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근데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힘든 일이 생겼다. 이번엔 엄마가 아프다. 좀 많이. 지난주 제주도에서 휴가를 다녀오고, 주말에 뒤늦은 가족 생일파티에서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식을 털어놓았다.


문제는 자식들이 이 사실을 가장 나중에 알았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엄마 혼자서 검진을 받으러 다니고, 가끔은 검진 일정 당길 수 없는지 사정사정을 하고 다녔다. 그 과정에서 20분 거리에 사는 나만 이 심각한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고3인 사촌동생도 소식을 듣고 큰이모(그러니까 우리 엄마)한테 홍삼도 보낸 지 오래더라.


청천병력 같은 소식을 접하고 나한테 말하기까지 일주일의 시간 동안 엄마가 얼마나 고민했을지 짐작이 가서 눈물이 살짝 났다. 사실 나도 작년에 엄마랑 누나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혼자 발을 동동 굴렀으니까. 그렇게 누구보다 가깝지만, 누구보다 솔직할 수 없는 가족의 삶을 하루하루 살아간다.


요 며칠 머리가 너무 아프다. 엄마의 병간호와 가족의 생계라는 숙제가 갑자기 떨어졌으니까. 근데 회사에서의 성과 압박은 갈수록 거세지고. 나는 회사에 도움이 안 되는 존재인 것 같아 양심껏 나가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말았다. 그럼 나만 아니라 가족이 힘들어지니까. 흔들리는 마음을 다 잡고 싶어, 엄마를 흉보는 것 같으면서도 엄마를 생각하는 글을 썼다.


아자아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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