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방생당
생일이면 아침마다 하는 다짐이 있다. 바로 들뜨지 말기. 수많은 평범한 날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무난무난하게 보내려고 애를 썼다. 이유는 두 가지. 우선 그래야 멋있어 보이니까ㅋ. 두 번째는 생일을 화려하게 보내본 적이 없어서ㅜ
기나긴 취업준비생 시절에는 생일을 생일답게 보내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하반기 공개채용이 뜨는 시절이기도 해서, 일부러 더 독서실로 향해서 스스로를 '닭장'에 가둬놨다. 물론 틈만 나면 카카오톡을 확인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감성 글을 올리기 바빴지만.. 암튼 조촐하게 생일을 맞는 게 일상이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생일 주간이라 휴가를 썼고, 휴가 잘 보내겠다고 제주도까지 왔지만, 그래도 평온하려고 애를 썼다. 머나먼 땅에서 혼자 생일 맞는 것 들킬까봐 오히려 사람들이 몰라주길 바랐다. 모순되게도 종일 핸드폰을 붙잡고 알림 확인을 하긴 했다.
어제 문득 '시방생당'이 생각났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는 트위터로 사람들이 소통을 했고, 대화 주제가 겹치는 사람들끼리는 '#000당'이라고 해시태그를 붙여 대화를 나누는 게 아주 잠깐 유행했다. 고로 시방생당은 시험과 방학에 생일인 사람들이 모인 무리였다. 다들 한이 맺혔는지 짧은 시간에 꽤 많은 사람이 모였다.
흔한 대화 주제는 시험 기간에 생일과 방학에 생일 중 누가 더 불쌍하느냐였다. 나는 당연히 '방학에 생일인 경우가 불쌍하다' 편이었다. 백만 배는 더 불쌍하다. 시험 기간에는 그래도 학교에 나오지 않나. 선물이라도 받을 수 있다. 방학에는 그런 것 없다. 고로 학기 초에 열심히 선물(그래봤자 매점에서 과자 사오는 정도지만) 주고, 정작 내 생일에는 빈손이 된다. 왜 열심히 결혼식 다니면서 축의금 내고 다니는 요즘이 생각나는 것일까..ㅜ
또 초등학생 때는 학교 짱(그래봤자 한 학년에 2학급 밖에 없는 촌동네지만) 생일이 이틀 더 빨랐다. 축하의 정도가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딱 한 번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는 생일잔치를 했는데, 너무 조촐해서 비참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 연차내고, 엄마 친구들까지 일손 돕겠다고 왔는데 말이지.
어쩌면 들뜨지 않으려는 다짐은 일종의 자기방어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소소하게 생일 보낼 운명인데, 마치 내가 의도한 것처럼 보이면 덜 창피하니깐. 그렇게 가면을 쓰고 20년 넘게 살아왔다. 생일파티를 성대하게 여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나도 한번만 오프라인에서 축하 많이 받아보고 싶다...ㅜㅜ
다행히도 적지 않은 카톡과 기프티콘이 도착했다. 이렇게 1년 마다 나의 인간관계를 되돌아보게 된다. 작년에는 축하해줬는데 올해는 어떠한 연락이 없다는 건 내가 처신을 잘 못했다는 것이겠지. 그렇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곁을 떠나갔다. 출입처가 바뀌었다는 것도, 매일매일 사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것도 모두 핑계다. 내가 조금만 더 사람들을 잘 챙겼다면 이런 후회 자체가 남지 않았겠지.
나는 축하해준 적이 없거나 대충 톡하고 말았는데, 그 이상으로 돌아온 경우는 그대로 또 반성하게 된다. 대체 난 주변 사람 관리를 잘 하고 있는 걸까.. 분명 작년 생일에도 사람 잘 챙기자고 다짐했는데, 1년 동안 뭘 한 걸까..
내년에는 달라져야지!라고 하기에는 이젠 나이 먹는 게 무서워서 다음 생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ㅎ 농담으로 내뱉던 '영포티'가 진짜 가까워지니 생일도 달갑지가 않다. 그래도 매일매일 성장하는 사람이고 싶다. 외로움도 외로움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말만 아니라 진짜로 들뜨지 않는 여유가 있는 사람. 이젠 마냥 젊은 나이가 아니니 말이다. 우선 주변 잘 챙기기부터 실천해야겠다.
배탈이 나 조식 부페 한 끼만 챙겨먹고 열심히 돌아다니기만 한 오늘도 이렇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