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0-하루살이도 꿈이 있다

할말하않

by 송사리

"송사리야, 우린 그냥 하루살이 인생이야"


어느 금요일 오후, 단 둘이 탄 엘리베이터에서 맞선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금요일. 그러니까 네 번을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한 선배가 마지막으로 산화하는 날. 선배 안색은 황태보다 훨씬 어두운 빛깔을 보이고 있었다.


참 일관성 없게 식품업, 제조업을 거쳐 미디어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월급쟁이 사는 게 다 똑같지 뭐~"라며 시간 가는 대로 살았는데, 요즘 들어서야 업태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어느덧 입사 5개월 차. 짬 좀 찼다 이건가.


굳이 비유하자면, 냉면 장수에서 냉면 제조 인부가 된 기분이다. 냉면 장수의 기본 마음가짐은 '물 들어올 때 노 젓자'일 테다. 어디 냉면이 매일 잘 팔릴 수가 있나. 비오는 날도 있고, 추운 겨울도 있는데. 일희일비하지 않고 무더운 여름날 바짝 팔면 된다.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당시, 매일 아침마다 내가 얼마나 제품 팔았나 단톡방에 까발려지긴 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일 더 팔면 되니까.(꾸준히 못 팔아서 나와야 했던 건 안 비밀..ㅜ)


이렇게 태평한 놈이 냉면 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예를 들어 매일 최소 100그릇씩 만들어야 한다. "오늘 다 못 만들면 내일 더 만들면 되지~" 같은 건 없다. 매일 100그릇 이상 만드는 조건으로 나와 회사는 근로계약서에 서명했다.


근데 어디 매일 균일하게 생산하는 게 쉽나.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컨디션이 안 좋을 수도 있고, 기계가 고장 날 수도 있고, 재료가 제때 안 들어와 녹록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100그릇을 만들어내야 한다. 왜냐면 회사도 매일 일정량을 납품하기로 세상과 계약서를 썼거든.


그렇게 사무실에는 하루살이들만 득실하게 되었다. 대충 2시가 납기다. 그때까지 납품 물량을 채우기 위한 경주가 벌어진다. 근데 꼭 바쁠 때 연락오거나 딴지 거는 사람들이 무진장 많다. 겨우겨우 물건을 넘기면, 잠시 숨 골랐다가 다시 냉면 만들러 간다. 내일 만들면 되겠지? 했다간 분명 뭔 일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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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인생을 반복하다 보니 가림막을 끼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시야가 좁아졌다. 딱 내가 맡은 일과 분야 말고는 어떤 것도 안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같은 사무실 안에서도.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점점 늪에 빠지는 아주 먼 옛날 카드 과소비 방직 공익 광고 주인공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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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는 그토록 고대하던 목금토일 4일 연휴. 어딘가 여행이라도 가고팠지만 서울에 잔류해야 했다. 전 직장 동기의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 '前'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으니 어딘가 가기 께름칙한 건 당연하다. 그러나 단톡방에 모바일 청첩장이 올라와 피할 겨를이 없었다. 일할 때 많이 의지한 형이기도 하고. 에라 모르겠다. 미리 보낸 축의금이 아까워서 끼니라도 때워야지 하는 마음으로 나갔다.


그래도 열심히 일한 곳인데, 혹시 보고픈 사람들 마주할까 기대하는 마음이 왜 없었을까. 근데 얼굴 보기 불편한 사람도 섞여있었다. 딱 최소한의 인사만 한 다음 밥만 먹고 돌아갔다.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소외감 때문에 배가 아팠거든.


괜히 짜증나는 마음에 집에서 맥주 한 캔 까다가 깨달았다. 하필 내가 결혼식에 간 그날은, 그 직장에서 마지막으로 일한 지 딱 1년째 되는 날이었다는 걸. 자존심도 없지. 그것도 모르고 제 발로 호랑이굴에 찾아가다니. 하루하루 사느라 바빠, 자존심도 못 챙기고 살았다. 뭐만 하면 다 기억해서 지탄받던 나인데 말이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매일 익숙한 풍경 속에서 뭔가를 끄집어내려 하기 시작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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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것 아닌 풍경을 찍은 다음 음악을 덧붙여 올리는 취미가 생겼다. 그냥 외근 나온 게 신나서 올리기 시작했다. 사진을 돌아보니 놓치고 있던 것들이 보인다. 어떤 사진은 면접을 위해 애간장을 태웠던 흔적이 묻었고, 또 어떤 곳은 좋아하는 사람과 거닐던 낭만이 있었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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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렇게 아저씨 같다는 꾸중을 듣지만 더 자주 올려봐야겠다. 하루살이도 꿈이 있거든. 일에 매몰돼 나를 놓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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