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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홍 Feb 13. 2018

동성

너와 나의 거리 이억 삼백만 광년.



  나는 연습실 한편에서 얼마 후에 있을 공연을 위한 연습을 하고 있었고 자꾸만 실패해버리는 지젤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연습실을 울리는 음악이 중단되고 숄을 두르고 있는 담당 교수님 뒤로 경찰복을 입은 두 사람이 따라들어왔다. 나는 얇은 남색 카디건을 두르고 빈 강의실에 들어갔다. 한 경찰은 검은색 수첩을 차르륵 펼쳐들고 나에 관한 이야기들을 물었다. 아주 꼼꼼하고 세심한 질문들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두 명의 경찰 중 검정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은 모자를 바로 고쳐 쓰며 영훈이와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영훈이요?"
  영훈이라는 이름을 육성으로 들은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실제로 나는 한동안 고개를 갸우뚱 거렸고, 형사들은 의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영훈이는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언제나 레이로 불리길 원했고, 오직 레이로서만 그는 살아있는 듯 했다. 자꾸만 답을 재촉하는 경찰에게 나는 그냥 친구라고 답했고, 검은색 수첩을 펼쳐 쥐고 있던 경찰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줄무늬 덮게의 양장으로 된 작고 두꺼운 공책을 건네주며 짐작이 가는 곳이 있다면 연락을 달라고 말하고는 돌아섰다.  
  "저, 근데 영훈이는 왜 찾고 계신 거예요?"
  나는 돌아서는 형사를 붙잡고 물었다.
  "실종신고입니다."
  덤덤하게 말하는 형사를 보내고 나는 건네받은 공책을 펼쳤다. 그것은 레이의 일기장이었다. 그리고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를 괴롭혔던 찝찝함의 원인을 알아냈다. 나는 지금 당장 주저앉아 눈앞에 있는 장난감을 가지지 못한 아이처럼 땡강을 부리며 울고 싶었다.  
  나는 레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장난처럼 자신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말하던 레이는 이제 없다.  
  레이의 일기장을 받고 나서부턴 도저히 연습에 집중할 수가 없어 밖으로 나와 지하철로 향했다. 왜 나는 처음부터 레이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레이를 찾기 위해 갈 수 있는 곳은 다만 몇 군데라도 있었을텐데.  
  지금 타고 있는 지하철 조차도 레이와 함께 타고 다녔던 지하철이었다. 모든 게 그대로 지루한 풍경조차 그대로인데 레이가 없다는 것이 갑자기 더 크게 다가왔다. 그러다 언뜻 앞으로 익숙한 뒤통수가 옆 칸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홀린 듯 일어나 그 뒤통수를 따라 옆 칸으로 이동했다.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열차가 잠시 멈추고 문이 열린다.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며 북적이는 그 칸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뒤통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고정하고 문이 닫히기 전에 열차를 빠져나왔다. 일정한 속도로 계단을 올라가는 뒤통수를 따라 달렸지만 어쩐지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고, 출구를 빠져나왔을 때는 완전히 놓쳤다고 생각했다. 수없이 많은 머리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고,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뒤통수는 지금 이 거리를 걷고 있는 모든 사람의 뒤통수였다. 아무도 나에게 고개를 돌려 본인이 누구인지 확인시켜주지 않았다. 나는 높은 빌딩이 즐비한 그 곳 지하철 입, 출구를 막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찌릿한 시선을 느끼며 서있었다.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다시 찾은 강변의 풀밭은 끈덕지게도 습하게 변해있었다. 더위로 인해 높게 치솟은 불쾌지수를 달래주는 강이 흐르고 있고, 철없어 보이는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두 명과 여자아이 두 명이 함께 작은 폭죽을 터트리며 물속으로 던지고 있었고 레이가 앉아있던 긴 의자에는 어떤 연인이 앉아있었다. 나는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꼭 이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허탈한 마음에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쩍 벌어진 입 사이로 작은 풀벌레가 들어오려 하자 레이는 손을 휘저었고,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을 보며 꿈틀꿈틀 온 가슴속을 헤집고 올라오는 벌레들을 쫓아내지 못한 채 그곳에 멈춰있었다
  '너와 나의 거리 이억 삼백만 광년.'
  일기장 언저리의 문장을 가리키는 손 끝에 통증이 느껴진다. 이억 삼백만 광년이라니, 그 거리가 도대체 얼마만큼인지 너는 알고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인지, 내가 달려가면 수일 내로 닿을 수 있는 거리인지, 좁혀질 수는 있는 건지. 지금 당장 레이에게 묻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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