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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홍 Feb 26. 2019

완전한 공존

인증을 받은 약자와 인증을 받지 못하는 약자.


완전한 공존이 가능할까 생각하다, 완전한 공존이 무엇일까로 돌아간다.
모르긴 몰라도 함께 공존하기에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강한 자의 도움을 받는것일테지.
다행히도,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시스템이 넓은 범위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보장이 되어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에도 인증을 받은 약자가 있고, 인증을 받지 못하는 약자가 있다는걸 알까?
나는 요즘 명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인증 받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어떠한 작업에 열중해있는데, 이 작업을 위한 아이디어를 짜다가, 아무래도 세상은 인증받지 못한 사회적 약자가 대다수 이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아무런 보장도 받을 수 없는 인증 받지 못한 약자는 어떻게 해야하나 의문이 들었다.
계급사회는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사회는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고, 과연 나는 보이지 않는 계급 속 어느곳, 어디쯤에 위치해 있을까 생각하니 회의적이 기분이 들게 되는것이다.
터질듯한 머리를 붙잡고 생각 전환을 위해 켠 영상엔 동물들의 해맑은 모습들이 나온다. 관련 영상들을 멍하니 보다가, 훈련하는 영상에 뭔지 모를 거부감이 든다.
(그렇다고 함께 지낼 수 없을정도로 말썽을 부리는 모습에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훈련을 강요 하는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거부감이 들 뿐.)
현 사회 동물은 사회적인 약자로 분류가 되어 보호받아 마땅한 존재이며, 사람과의 공존을 위해 다양하게 훈련을 받기도 하고, 동물 인권의 확대를 위한 운동도 규모가 커져가고 있다.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자면, 인간은 동물에게도 계급을 나누고 있다.)
그런데 일정의 먹이를 보상을 받으며 훈련을 받고 있는 동물들이 모습에는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지곤 한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동물로 살아본적이 없으니 그들의 생태계를 모르고, 또한 그들은 사람말을 할 줄 모르니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지금 삶에 만족을 하고 있는지, 받고있는 보상이 원하던것인지도 모르겠는것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반려 동물이라고 부르며 특히 개와 함께 밖을 나올땐 목줄과, 입마개등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가까운 동남아시아권의 개들은 비교적 자유롭다. 항상 방목되어있는 상태로 길러지기 때문에 사람이 익숙해서인지 짖거나 말썽을 부리는 경우를 개인적으론 본적이 없다. 다만 암묵적으로 정해진 행동은 개에게 접촉하지 않는것이다. (혹시모를 병균이 옮지 않도록 하는것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가만히 있는 대상을 자극하지 않는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개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여건이 된다면 키우고 싶은 종도 있었지만 그 생각은 내가 여러가지를 보고 자라면서 많이 희미해졌다.
개를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가(책임을 진다는것은 단순히 명을 다 할때까지 먹이를 주며 키우는것이 아니라, 함께 지낼 수 있는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는 모든것을 포함 한다.)도 모르겠지만, 사실 어떤 방법이 옳은지도 모르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존재의 애완동물이 되어버린 영화 판타스틱 플래닛의 모습처럼 그들도 그들끼리 모여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역으로 지구는 인간이 지배하고 있기때문에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는 인간을 위주로 판단되는게 옳다는 생각으로 나온 발상은 아닐지. 모든 영역에서 인간도 인간끼리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는건 아닌지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지만, 불완전한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또 이렇게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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