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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홍 May 27. 2019

태연할수 없는 소식

어느 유서


외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신 대전 현충원에 다녀왔다.
누군가의 사망 소식이나 사망할 뻔한 사건은 연일 티브이나 기사로 접하지만, 가까운 사이에서 들려오는 부고 소식에는 도무지 태연할수가 없다.
저번 주, 친구 아버지의 부고 소식에 겁이 털컥 났다. 멀게만 생각했던 일이 의도치 않게 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공포. 가까운 지인의 조부모 부고 소식은 들었어도, 부모의 부고 소식은 처음이라 무슨 말을 어떻게, 또 어떤 위로를 해야할지도 몰라 안절부절하며 장례식에 다녀왔고, 이번 주 금요일은 외할머니 2주기 기일이다. 사실 이번 1월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친척 동생의 부고 소식에 내가 무슨 말을 들은것인가 어안이 벙벙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일이라... 왕래는 자주 없었지만 친척들 중에는 그나마 가까운 곳에 살았던터라 아무런 도움도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이 그런 소식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무력할 뿐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고 묘비를 닦고, 꽃을 새로 갈았다. 처음 할아버지를 모실때만해도 텅 비어있던 대지는 타인의 묘비로 빼곡히 채워져있었다.
서울로 올라오며 유명 연예인의 자살 기도 소식을 기사로 봤고, 저마다의 위로나 질책의 댓글을 보며 작년 2월 서산 우체국 직원의 유서가 떠올랐다.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시작해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끝이나는 유서였다. 처음 읽게 되었을때 느꼈던 먹먹함이 아직도 글 속에 서려있다.
누군가는 자살을 충동적으로 하는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충동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이유도 필요할테고, 다짐도 필요하다.
요즘같이 생면부지의 사람에게까지 간섭하기 쉬워진 세상엔 그런 모든 다짐들을 한 순간에 우습게 만드는것이 너무 쉽다. 타인의 죽음에 저울을 달아 옳고 그름을 따지기도 하고, 타당성과 합리적인지를 따진다. 근데... 글쎄.
어느 누가 자신의 죽음 앞에 이성적일수 있을까? 고작 그런 일로, 그런 좋은 배경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건 옳지 않다고 누가 정할 수 있을까? ‘죽고 싶지 않았다’라는 말의 울림이 무겁다.
하루에도 수십 수만개의 사회적 문제들이 쏟아진다. 어떤것들은 중요하게 분류되어 우리에게 알려지고 그 외에것들은 묻힌다. 수면위로 나온 사건들은 또 저마다의 판결을 기다리기도 한다. 너무나도 안타까운건 그 많은 사건들에 유난을 떤다며 희화화 시키는 모습이다. 나는 그런 모습에 가장 지치고, 순식간에 전의를 잃게 된다.
하인리히의 1:29:300법칙은 1명의 중상자가 나왔다면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이 있고,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수 있는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이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면 위로 떠오른 다양한 문제들에는 다양한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는것을 속단하지 말고 문제 해결과 방지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지표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갔으면 하는 바램에서 글을 적어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글에 언급 되신 모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태연할수_없는_소식
#하인리히의_법칙
#삼가_고인의_명복을_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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