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치료의 시작.
보일러가 여름 내내 말썽이었다. 온수가 나오게 하려면 뜨거운 물 쪽으로 수전을 돌려놓고 30분 이상 기다리거나 혹은 물을 틀어놓고 변기 물을 수시로 내려 보일러가 나 지금 물 쓰고 있어!! 를 인식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름 동안 찬물로 샤워한 게 여러 번이었다.
딱히 보일러에 에러 표시가 뜨지 않아 고장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또 어찌어찌하면 따듯한 물이 나와 그냥저냥 사용하고 있었다. 온수 쪽으로 물을 틀면 물의 양이 굉장히 적다는 것. 때문에 온수 쪽이 새나?? 하며 잘못된 진단을 내리고 2년을 살았다.
처음 이사를 왔을 때부터 조금은 말썽이던 녀석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고, 어찌어찌하면 나오는 온수라 스트레스를 매우 받았지만 그냥저냥 살았다.
어느 날 남편이 참다 참다 AS 좀 불러주라고 해서 기사님을 불렀고, 진단은 보일러 고장이 아닌 수도관 온수 밸브 고장.. 기사님이 고치는 일은 아니라고 해서 남편이 반나절을 할애해가며 열심히 고쳤다.
고치고 나니 세상 시원하게 물이 나오고 온수는 틀자마자 나오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고, 문명이 이렇게 좋은 거라며 남편이랑 신나게 웃었다. 이제 아이들 목욕시킬 때 온수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뜨거운 물이 끊길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남편은 온수가 잘 나오자 출근 알람을 10분 줄였고, 나도 아침에 아이들 보내 놓고 집에 와 바로 씻을 수 있어 출근 준비 시간이 줄었다.
몇 달을 왜 고생을 했을까. 이렇게 시원하게 온수가 잘 나오고 맘고생도 안 하고 스트레스도 안 받는데 진작 기사님 불러서 고쳤으면 얼마나 편했을까..
나는 오늘 문득 나갈 준비를 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렇구나…
나는 오랫동안 우울감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처음엔 이렇게 힘든 줄도 몰랐다. 특히 결혼 전에는 술 마시고 놀고 여행 가고 쉬는 시간들이 있었기에 그럭저럭 지냈는데 결혼 후 아이를 낳고는 완전히 망가져 온수가 잘 나오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편과 나는 나오지 않는 온수를 어떻게든 나오게 하려고 이 방법 저 방법을 썼고, 그때마다 우여곡절 끝에 온수가 나오니 그냥저냥 지냈던 것 같다.
여름 한철이 그렇게 지나고, 온수는 점점 더 틀기가 어려워졌고, 나도 그랬다. 감정의 기복이 더 심해졌고, 아이들에게 비 이성적으로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고, 우울감이 점점 심해져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일이 많았다. 아침에는 나오지 않는 온수를 핑계로 출근 준비를 최대한 미루고 누워있었고, 일하러 나간다는 걸 핑계로 집안일은 거의 손을 뗀 지 오래였다. 하루 종일 핸드폰을 보거나 드라마에 빠져서 하루 종일 넷플릭스를 보았다. 넷플릭스 중독자처럼 아이들을 볼 때도 핸드폰으로 드라마를 켜놓고 보곤 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며칠 동안 아이들에게 폭언을 하고, 화를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르고, 도저히 아이들을 보는 게 두려워 부모님께 도움을 청했다. 시부모님이 오셨고, 너무 힘들면 바람을 좀 쐬라고 하셨지만 나갈 힘이. 아니 마음이 없었다. 그때 나갈걸… 시부모님 앞에서 아이들에게 또 폭언을 하고 방에 틀어박혀 드라마를 켰다. 이어폰으로 소리를 듣고 영상에 집중했다. 잠시 벗어난 것 같아 더 몰입했다. 빛이 들어오는 게 싫어 창가에 있는 커튼 뒤에 숨어 있었다. 남편이 집에 오고, 부모님이 가셨다. 첫째를 남편이 재웠는데 둘째가 떨어지지 않는다. 둘째를 무릎에 눕히고 재우고 있자니 눈물이 났다. 펑펑. 아니 거의 목놓아 울었다. 소리를 낼 순 없으니 숨죽여 목놓아 울었다.
둘째를 어찌 재우고 맥주를 꺼냈다.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 남편이 칵테일을 만들어준다. 나는 또 울었다. 남편은 내일 당장 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예약되는 병원이 없어 우선 급한 대로 산부인과에 갔다. 생리 전이면 더 심해지는 증상이 있었기 때문에 진료를 보았고, 신경 안정제를 처방받았다. 마음이 놓였다. 예전에 힘들 때 상담을 받았던 선생님과 연락을 해서 상담 시간을 예약했다.
저녁 5시에 상담실로 들어갔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더니 병원에 가보는 걸 찬성한다고, 병원 추천을 해 주셨다. 약의 힘을 빌어 보라고.. 그리고 다른 상담사를 추천했다. 자기가 했던 방법 말고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는 상담사를 만나보라는 조언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원인을 잘 못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온수가 나오지 않는 게 보일러 고장은 아니라고 했었다. 그건 맞았는데, 원인을 딱 알진 못했던 것 같다. 상담 할때도 그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서 상담사는 물이 나올 수 있는 방법들을 장황하게 설명을 해 주었고, 우리는 그 방법을 시도해보며 드디어 온수가 나온다고 좋아했던 것 같다.
실제로 노력끝에 온수가 나오면 나온다~ 하고 좋아하며 샤워를 했다. 하지만 찬물 쪽으로 조금만 더 틀어도 멈추는 보일러에 노심초사하며 샤워를 해야했고, 나중에는 온수가 끊기지 않게 하는 조치들을 해야만 끝까지 온수샤워를 마칠 수 있었다. 결국 물을 계속틀어 놓고, 약간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야하는 상황… 이렇게 불편한 방법으로 일년을 살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하루하루 어찌어찌 살고 있었지만. 그동안 배관 벨브는 점점 더 망가지고 있었다.
상담사와 진행했던 일들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물론 많은 도움이 되었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어쨌든 온수를 나오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어찌어찌 온수를 틀어 따듯한 물로 샤워를 했으니 감사한 일이다.
이제는 남편도 나도 지쳤다. 노력을 해도 안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AS기사를 불러달라고 했고, 나는 나를 위해 기꺼이 기사님을 불렀다. 그리고 오늘 기사님을 만났다. 이 기사님이 정확한 진단을 내려줄 수 있을지.. 수도관 밸브가 고장이 났다는걸 찾아줄 수 있을지… 그걸 고치면 뜨거운 물을 마음껏 쓸 수 있을지..
남편은 이번에도 사람을 부르지 않고 스스로 고치겠다고 나섰다. 배관을 고치려고 한나절을 썼던 남편은 우여곡절 끝에 배관을 고치는데 성공했다.
이번에도 잘 고칠 수 있을까?
배관을 고치기 전 기사님이 진단을 잘해 주면 좋겠다. 다른 곳에서 힘 빼지 않도록. 오늘 남편은 저녁 8시에 잠이 들었다. 이제는 배관이 아니라 사람을 고치는 일이어서 한나절이 아니라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벌써 저렇게 열심이다. 나오지 않는 온수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짜증이 늘었지만, 남편은 늘 그렇듯 온수가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이번엔 남편이 아닌 내가 고치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그동안의 스트레스에 배관 고치는 스트레스를 더하고싶진 않다. 하지만 앉아서 구경만 할 사람은 아니니 내가 더 잘 해야지..
온수가 나오고 남편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스트레스의 원인이 사라졌기 때문에 화낼 일도 없다. 우리도 원인을 알고 잘 고치면 평온해질 수 있을 것이다. 고치기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남편이 있으므로.
그리고 드디어 내가 AS를 불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