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스페이스 신사옥 운영자인 이지영 옥정호 두 미술작가의 ‘전시운동’ 일환에서 일 년에 한 번 공모제를 통해 당해 연도 국가기금을 받지 않은 작가의 미발표 작을 중점으로 개인전을 열어주며 미술작가로서 가진 것 안에서 다시 미술작가와 나누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 첫 포문을 연 선정자는 박재철 작가이다. 작가의 작품 제목이기도 한 이번 전시《구원은 없다》는 2016년부터 현재까지 박재철 작가가 천착해 온 작품의 내용과 달라진 그리기 방식을 한 전시 공간에 전개하는 것으로 기획된다.
박재철 작가는 동양화 기법과 지필묵으로 동시대를 말할 수 있는지 본인의 기술적 토대에 대한 의문을 품으며, 한국 사회의 가족 공동체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삶, 소비자본주의 시대 인간의 궁극적 열광과 구원이라는 명제, 인간의 생태적 욕망에 관한 질문들로 25년째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이다. 1993년 광주시립미술관의 한국화 대전으로 미술계에 등단한 작가는 1999년 첫 개인전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을 개최하고 17년 만인 2016년에 두 번째 개인전 《아물지 않은 상처》을 연다. 2016년은 작가의 첫 번째 예술적 전환기이기도 한데 자주 접하는 길거리 사물들에 빗대어 화폭을 거울삼아 한 장의 줄거리화로 감각적 인지를 불러내고, 강박적 그리기를 하던 시기로 일상적 현상학에 심취해 있던 때이다. 숨겨지게 버려진 음료수 병을 날아다니게 해방해 준다든지, 잘린 나무를 음료수병에 꽂아준다든지, 두상과 유사한 화병에 늘어진 버드나무를 꽂는다든지 작가의 행위가 돋보이는 정물화 장면들이 있다. 작가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바닥을 90도 곧추세운 시선의 작품 <잠시 머뭇거리다>는 작가의 시선에 따라 관객의 눈은 사물을 세세히 매만지며 거주한다. 여백 없이 그려진 이 작품 속 보도블록 하나는 책으로 끼워져 있는데 이 책은 작품 <봄은 아프다>에서도 피 흘리는 가로수를 구획해 주는 블록들의 형태를 띠고 여러 권으로 나타난다. 학습한 미술 철학의 참고문헌들로 추적할 수 있을 만큼 세월로 뭉개진 듯 잘린 듯 인지할 수 있는 제목들로 등장한 이 책들은 작가가 딛고 서 있는 지금의 토대, 혹은 작가를 둘러싸 주고 있는 보호물로서 상징적인 사물이다.
작가가 고민하는 재료는 ‘먹’(墨)이다. 새로운 토대를 창안하기 위해 작가는 수묵이라는 기법으로부터 낯설게 화폭을 세워 그려보고, 화폭 속 소재의 형상 너머로 흐르는 물감을 수용하고, 동양화에서 소외시킨 인간 나체도 그려보며 익숙하지 않은 색채들도 사용해 본다. 작가가 기존과 다른 ‘리듬’을 가지려면 아무래도 굉장한 강도를 요구받는데 작품 흐름상 팬데믹 이후 어쩌면 사회적 거리로 자연스럽게 내가 나를 자주 만나는 때, 공동체로부터 나와서 개인으로 돌아왔을 때 바로 이와 같은 징후들이 나타난다. 현재 작가의 그리기 연구 전략은 선의 처음과 끝을 화폭에 포획해 보는 선 긋기이다. 작가가 포획한 선 긋기로 화폭 속 소재의 테두리에 형성된 틈들은 차원의 분할을 중개하고, 이질적인 소재의 불균등한 결합으로 미적 조화의 단절을 일으키면서 작품 특유의 힘을 분출한다.
규모 면에서 작가의 평면 작품은 회화(peinture)에서 타블로(그림, tableau)로 변화하는 데, 회화는 시각적 이미지로 구성되어 전체를 주로 한 번에 보여주지만, 타블로는 화폭이 커지면서 관객을 그 화폭 안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지닌다. 작가가 선보이는 타블로에서 흐릿한 벚꽃의 이미지는 이전의 묘사적이고 재현적인 꽃 그림과 다르게 생동적인 효과를 준다. 이러한 생동의 전략은 강렬한 붉은 색을 토대로 이웃한 소재들과 부딪히고 다투면서 전개되는데, 배치의 부딪힘으로 영토화를 이룬다. 자기-전개, 자기-운동을 향한 하나의 과정으로서 영토화는 어떤 것이라도 표현의 질료로 바꾼다. 즉, ‘영토’* 행위로서 새가 아름답게 노래하여 자기 영토화를 하듯 작가는 선 긋기와 강렬한 빨간 색으로 영토화 운동을 하고 있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의 저서인 “1837년-리토르넬로에 대해”, 『천 개의 고원』에 나오는 용어이다. 또한 “영토는 예술이 가져다주는 효과”(p.600)라고 언급한다.)
작가는 개인의 내면을 화폭으로 이동시키고, 사물도 하나의 개별체로서 바라보기를 한다. 허공을 보며 눈물을 계속 머금고 흑백 화면 속에 앉아 있는 여자, 허공을 보며 덤덤하게 나체 상태로 앉아 울지 못하는 남자, 무한의 시간 속에서 화투 치는 인간의 광기 어린 눈빛, 사회적 구조물에 쓸려 내려가는 사람들,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들과 숱하게 버려진 일회용 플라스틱 음료수 병 등을 등장시키는 데 주목한다. 이러한 내면들을 등장시켜 작가의 바라보기와 관객의 관점을 동일시할 최대한의 방법을 꿍꿍한다. 내면에 들어차 서로 부딪혀 소리 날 수밖에 없는 것들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느꺼움의 미학을 펼친다. 세상의 흐름에 편승해도 그렇지 않더라도 인생의 마주한 어떤 것들로 작가는 비집고 나오는 작품들을 잉태한다.
어린 시절 누나들과 손가락에 봉숭아물을 들이며 행복했던 작가의 기억을 봉숭아꽃 그림으로 화폭의 중요한 인물 옆에 둔다(그린다). 구원은 없는가? 하지만 봉숭아꽃은 어디에나 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봉숭아꽃과 같은 존재는 있다. 작가가 선 긋기를 한 개별의 내면 공간들에서 충분히 시간을 가진 후 관객은 퇴적한 시간 속에서 잊은 것을 끄집어내는 시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전시의 이동술이자 그림 속 화투 치는 광기 어린 자들과의 눈 마주침에서 끌려들어 가는 목적지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