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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로디 옹그 Apr 19. 2020

미술전시, 당신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미술사를 둘러싼 소소한 이야기 N.7

군중들은 방 사이를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그림을 보고 '훌륭하군',
'훌륭하군' 한다.
뭔가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들을 수 있는 사람들도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상태가 바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불린다.

- 바실리 칸딘스키,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21쪽,
1912년 최초 발행, 권영필 번역,
1979년 열화당 출간


미술 전시를 관람한다? 미술 작품을 감상한다?! 우리는 작품에 대하여 최소한의 정보가 있는 '캡션(Caption, 작품 설명문)'을 찾는다.

어리둥절함이 컨템퍼러리 아트와의 첫 번째 소통.

-갸우뚱. 처음 뵙겠습니다..-


방황하는 감상자의 눈동자는 작품 근처 부착되어있을 캡션에 표기된 작품 이름, 제작연도, 짤막한 문구를 읽어내린다. 한 장의 전시 설명문 '리플릿(Leaflet, 종이 한 장에 전시 설명과 작품 목록, 배치도를 기재한 인쇄물, 한 장을 여러 번 접어 사용도 함)'을 읽으며 전시 기획 의도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다시 작품을 보고 감상자는 나름의 이해를 했다고 스스로 합의하고 다음 작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음.. 잘 모르겠다.


태생 혹은 생성 과정 자체를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컨템퍼러리 아트도 있다.

미스터리가 컨템퍼러리 아트와의 두 번째 소통.


한 번의 시선으로 읽히지 않는 컨템퍼러리 아트는 시각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예술가에 의해 선택된 사물을 통해 감정 체계나 세계관을 드러낸다.


미술 작가. 화가. 조각가. 미디어 아티스트 등으로 불리는 예술가의 작품에 대해 관객과 작가가 대면하며 이야기를 나눠보는 '작가와의 대화'-아티스트 토크-를 열어 작품과 관객 사이 이해의 간극을 좁혀보려는데 사실 1900년대 초 모더니즘 예술 등장이래 이 어리둥절함과 미스터리는 여전히 유효하게 계승되고 있는 유산과 같은 것이다.


예술에 발전이 있는가?


미리 말하자면, 예술은 진보성을 논하는 특성의 것이 아니다. 양식 조차 없어져버린 컨템퍼러리 아트의 등장으로 전시제작 방법과 전시 관람 문화의 발전은 있으나 예술 본연은 봉인된 영원성을 띤다. -컨템퍼러리 아트 프로젝트 중에는 이 또한 우습게 깨버리는 작품도 있지만 말이다.-


현대 미술사가들은 모더니즘과 컨템퍼러리 아트 사이 구분 짓기 위하여 몇 가지 징후나 특성으로 묶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사실 모더니즘의 전반적인 감상 구조는 지속되고 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고도의 기술이 컨템퍼러리 아트에 유입이 되어 발전된 기술로 새로운 양상들이 등장하였으나 이것을 설명해줄 수 있는 예술철학적 이론은 기계 복제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그렇다. 컨템퍼러리 아트는 모더니즘 이후 계보는 갖추었으나 정체는 모호하다. 다시 말해 상징주의-고전주의-낭만주의-절대주의-아방가르드 예술(다다-초현실주의) 선상에서 멈춘 채 ‘고유의’ 획기성 혹은 천재성을 상실했다. 컨템퍼러리 아트의 고유성을 언급하는 것조차 동시대적 사고에서 어긋날 수 있겠다.


예술의 고유성은 이런 것이다. 가히 시간-문화-시선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것 말이다. 미술평론가 존 버거의 말처럼 "모든 문화가 '아름답다'라고 생각할 만한 확실한 상수들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 상수를 자연의 예-어떤 꽃들, 나무들, 바위의 형태들, 새들, 동물들, 달, 흐르는 물 등-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어떤 인공적인 물건 앞에서 느끼는 심미적 감정은
우리가 자연 앞에서 느끼는 감정의 파생물이다. - 존 버거


위의 말은 나도 모르고 당신도 모르는 작품 전시를 보았어도 자연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으로부터 파생되는 감정을 어느 작품에서 느껴보았다면 그것은 심미적 감정이다. 누구나 전시 관객으로서 작품 감상에 있어 기본 조건을 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준비되어있는 감정체이다.


예술가가 만들어 내 앞에 둔 작품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시대의 역사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당대성과 무관하게 미의 가치가 영원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진리를 뜻한다. 어떠한 개념이 매개가 되어 목적을 갖게 되면 이것은 이미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 전제된다. -칸트, 목적 없는 예술-


많은 정보를 선독해야 하는 컨템퍼러리 아트로 지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전시장에 들어가서 작품을 선별해내는 내 취향을 찾아내는 것에 집중하면 된다. 목적 있는 예술이 난무하는 현시대에 모두 모르는 예술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면 몇백 년 전 명품 회화 한 점을 구글링으로 살펴보는 것도 방법이다.


뛰는 가슴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슴 뛰게 하는 작품을 찾지 못한 것일 수 있다.


내 취향에 집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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