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택트 시대 예술 디알로그 No. 17
철학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좋은 질문을 세상에 던지는 것일까요. 세상을 헤아려가도록 도와주는 정신 활동일까요. 사물에 의문을 갖고 진리에 다가가는 학문일까요. 어쩌면 철학하며 산다는 것은 수련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예술가가 대중 앞에 자신의 세계를 시지각을 동원하여 펼쳐낸다면 자기 생각을 글로서 펼치는 철학자는 대중의 머리 속에 집을 짓고 그림을 그려준달까요. 지인 중에 철학자로서 바로 떠오르는 김홍기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월간지에서 아르바이트 했던 대학생시절 알게 되어 유학 생활 때 가끔씩 만나 한국에서 가져온 건어물을 공유하며 해외 체류가 길어지며 변하는 바이오리듬과 정서 그리고 이방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이 인물에 대해서 말이죠. 따뜻하게 건네는 인사말이나 두서없이 띄엄띄엄 내뱉는 그의 말은 그의 글이 뿜어내는 힘과는 굉장히 다릅니다. 말하기과 글쓰기의 메커니즘은 전연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이 인물의 요즘 생각이 궁금해집니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바라보는 팬데믹 세상은 어떨까요. 미술평론가 김홍기와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합니다.
질문 1 > 어떤 일을 하고 계시고, 포스트코로나 시대 이후 어떻게 예술을 보여주고 계신가요?
답변 1 >
미술평론가로서 계속 비평하는 일을 하고 있고 미술잡지에 전시 평론을 쓰고, 작가론 같은 경우는 도록에 들어가는 글을 쓰는 일, 여러 레지던시에 입주해 있는 작가들이랑 비평가로서 매칭이 되어서 서로 미팅을 통해 대화하고 자문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 외에는 번역자이기도 해서 미술과 미학에 관련된 책을 번역해오고 있습니다. 미술과 미술가에 대해서 글 쓰고 글 옮기는 일을 하고 있죠.
포스트코로나 이후 글쓰기라는 것에 대해서 따로 숙고해본 적은 없어요. 어차피 코로나 이전에도 글쓰기라는 것이 비대면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거시적인 관점에서 달라진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지만, 대면의 기회가 적어질수록 말보다는 글의 기능이 높아질테니 더욱 진중하고 진지하게 책임감을 가지고 글을 쓰려 합니다.
질문 2 > 현재 하고 계신 일로 제일 힘들거나 곤란한 점은 무엇인가요?
답변 2 >
글 쓰는 것이 본업인데 잡지사 원고료가 높아졌으면 좋겠어요. 이십 년 전과 원고료 시세가 똑같아서 본업으로 파생되는 부대적인 일들(심사, 자문 등)로 경제활동을 하는 현실이 힘듭니다. 본업으로서 더 나은 경제적 대가가 따라온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네요.
다른 측면에서 글 쓰는 사람으로서 힘든 점은 작가론을 쓸 때마다 완전 신진 작가가 아닌 이상 기존에 받았던 다른 평론가의 작가론이나 전시 평론 글들을 참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거기에는 나와 있지 않은 나만의 관점이라든지 해석이라든지 이러한 지점들을 고심하는 과정이 힘들다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이 발현되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해요. 이미 있었던 얘기들을 재탕하는 글은 의미가 없는 글이니까요. 이러한 과정을 통과할 때마다 길이가 몇 미터인지 모르고 터널에 접어드는 것처럼 마음이 갑갑해짐을 느낍니다.
비평은 문학의 5대 장르 중에 하나입니다. 창작 활동이지요. 창작하는 사람의 고충으로서 더 큰 압박감은 긴 터널인지 짧은 터널인지 모를 때인데요 이는 마치 두세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며칠이 걸릴 수도 있는데 그 얼마간이 걸릴지 모르는 그러한 현상입니다. 물론 그곳에서 빠져나왔을 때의 성취감이 있지만 창작에 있어 일종의 심연 같은 것에 입장하는 것과 같아서 제일 힘든 지점입니다.
미술 평론을 할 때 내가 좋아하는 작가라서 좋아하는 지점을 부각하는 얘기를 쓰는 것도 아니고, 내가 싫어하는 작가라서 그 결점을 강조해서 쓰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어하는 얘기가 무엇인가에 집중해서 쓰는 편이죠. 작품을 통해 우회하여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쓰는 편입니다. 평론에 있어 결국 더 중요한 것은 작가의 입장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논리를 얼마나 정연하게 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자세입니다. 이러한 자세에 대해 공감하고 지지하는 작가들은 제 평론에 대해 흡족해하기도 하지만, 어떤 작가, 특히 자기 자아가 아주 센 작가들은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하지요.
질문 3 > 언택트 시대가 되어 예술 측면에서 나아진 점이나 가능성이 있는 부분이 무엇일까요?
답변 3 >
나아지는 것이 있겠죠. 감각적으로만 현혹시키는 작업들이 금세 얕은 깊이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죠. 감각이라는 것 자체를 제고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여러 감각 중에서 촉각을 제고하기 시작했어요. 말도 공기의 음파가 귀를 때려서 나는 소리인데 촉각이라는 것이 그 이전에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언택트 시대가 되어 촉각의 본질이나 가치를 제고해 볼 수 있다는 계기가 됐다는 것은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술이라는 것이 감각을 재구성해보고 발명해보는 일이잖아요. 보통 미술은 시각에 많이 의존해 있는데 촉각이라는 부분도 미술작품을 대하는 데 있어서 어엿한 한 가지 요소임이 우연찮게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나아진 요소로 볼 수 있죠. 그리고 미술을 향유하기 위해 꼭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좋은 점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미술기관들은 코로나 이전부터 이러한 서비스를 만들 수 있었단 말이죠. 영상으로 만들고 교육하는 임무를 뒷전으로 하고 있다가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제되니까 광속으로 해내고 있죠. 미술관이 디지털 환경을 대중 교육의 장으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모마, 퐁피두 등 해외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도 집에서 아무 때나 여러 번 볼 수 있고, 인터뷰 영상도 훨씬 많아졌고, 온라인 콘텐츠의 질과 양이 모두 나아졌죠. 지금의 자세를 유지하면 좋다고 생각해요. 굳이 방문하지 않더라도 관람이 가능한, 이와 같은 좋은 방편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실제적인 전시 경험을 대체할 수는 없지만, 전시를 이해하는 레퍼런스로서는 꽤나 유용하니까요.
질문 4 > 코로나 이전부터 우리는 예술 측면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요?
답변 4 >
앞서 답변한 것과 이어집니다. 웹 기반 레퍼런스가 이전에는 풍족하지 못했죠. 평론가의 입장에서 나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것은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작품을 두고 생각해보자면 그것이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 후각 등 공감각적으로 호소하는 요소가 있는데 그것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가령, 냉장고, 세탁기가 늘 있다가 갑자기 없어지면 비로소 그것들이 나한테 얼마나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죠. 우리가 얼마나 다종다양한 감각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었는지 놓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비대면 소통은 시각이나 청각만 추출해서 디지털 기기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것이라서 상대방의 체취를 느낄 수 없고 상반신 이하를 볼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시각조차도 제한되어 있고 촉각은 아예 누락된 현실이 되어 버리니까 그 전에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촉각, 제스처의 현장성 등이 새삼 부각되는 겁니다..
질문 5 > 아쉽게도 실현하지 못한 프로젝트가 있으신가요?
답변 5 >
특별히 실현하지 못한 것은 없어요. 다만, 파리에 살고 있었을 때 로마, 빈, 피렌체에 여행갈 시간을 냈었어야 했는데 못 갔던 것이 아쉬워요. 로마는 로마시대 문화의 중심이고, 피렌체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이고, 빈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문화와 학문이 폭발적으로 번성한 곳이죠. 그나마 파리에서 쉽게 접근이 가능하고 필수적으로 가봐야 하는 곳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못 가고 귀국을 했네요.
주된 관심사를 거칠게 말하면 ‘흐름을 지체시키는 것’이에요.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관심이 ‘어떻게 하면 과학의 진보, 인류의 진보를 이뤄낼 수 있을 것이냐. 어떻게 하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더 빨리 돌릴 수 있을 것이냐’였다면, 1990년대 이후에는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어서 ‘어떻게 하면 시간의 흐름을 지체시킬 수 있느냐, 지연시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해요. 이전에는 미래에 도래할 것이 유토피아라고 믿었기 때문에 역사를 더 빨리 진보시키려 했으나, 지금은 미래가 곧 파국의 실현이기 때문에 어떻게 시간의 흐름을 지연시켜서 인류의 삶과 환경을 보호할 수 있느냐가 중차대한 문제라는 것이죠. 같은 맥락에서 ‘미술이 어떻게 지연된 시간을 시각화 혹은 감각화해낼 수 있는가’가 저의 관심사입니다.
이것은 요즘 유행하는 인류세 담론이나 포스트휴머니즘의 문제 제기와도 상통하는 것 같아요. 저는 이런 관점에서 비디오아트의 슬로모션 용법에 주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몽타주 등의 장치를 통해서 스크린 속의 서사를 어떻게 중단시키는가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있죠. 그래서 영상 작가들의 작가론을 많이 쓰는 편이고 언젠가 이러한 시각으로 쓰인 글들을 묶어 책으로 내보려고 해요.
질문 6 > 지금의 위치에 있기까지 영향을 받은 예술가나 인물이 있나요?
답변 6 >
프리드리히 니체입니다. 대학생 시절에 통학하면서 니체를 많이 읽었죠. 예술작품을 구성하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처럼 조형적인 것의 미가 있고 그를 와해시키면서 미적인 쾌감들을 느끼는 것이 있죠. 어느 것 하나에 우위를 두지 않고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가면서 감각적인 경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니체를 탐독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지금도 틈나면 한 문단이라도 다시 읽는 것은 니체 밖에 없어요. 살면서 만나왔던 친구 중에 영향을 준 사람은 미술관이나 공연장에 처음 데려간 친구들이 있겠죠.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교과서에 나온 문학이 전부인 줄 알았어요. 채만식과 같은 옛날 사람들이 소설가인 줄만 알았던 저에게 동시대인들 중에도 소설가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친구가 있겠고, 샤갈, 피카소, 엔디 워홀 정도만 알았던 저를 현대미술 전시에 데려가 지금도 작업으로 분투하고 있는 동년배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대학교 선배들과 동기들이 있죠. 중·고등학교를 인천에서 다녔는데 미술관이 없었어요. 인천시립미술관을 이제 짓고 있다고 해요. 학창시절에는 미술관을 가본 적도 없었고 입시 공부에 치여서 서점에서 한국 동시대 소설을 읽어보거나 극장에서 연극을 볼 기회도 없었어요. 순수문학을 접하게 해준 친구, 서울에서 살던 대학 동기들이 동시대 문화의 다양한 경험을 하게 도왔고, 선배들과 동기들이 단시간에 여러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흡수력이 빨랐던 20대에 내게 영향을 주었던 동료들, 동기들, 선배들이 생각나네요.
질문 7 > 예술가의 사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답변 7 >
실험정신이라고 생각해요. 실험정신을 계속 유지해나가는 것. ‘어떻게 다르게 사고하고 다르게 지각하고 다르게 생산할 수 있는가’ 이것이 실험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방식이 있을 것이고 시각에 대한 관성들도 있겠죠. 그러한 관성들을 비틀어서 다르게 감각하고 다르게 반응하여 다른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것이 실험정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곧 예술가의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좁은 의미이든 넓은 의미이든 실험정신에 기반을 두고 자기의 활동을 전개해나가면, 의사든 정치인이든 회사원이든 누구든지 예술적인 삶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겠죠. 다만 예술가들이 그 다름의 가치를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감각을 긍정하고 다른 사고를 창조하고 사람들, 이러한 것들을 계속 고안해내고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 예술가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