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를 둘러싼 소소한 이야기 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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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대한 단상, 그 세 번째 메모
전시를 좀 보러 다닌다는 사람들은 전시명칭 끝에 붙는 '展(전)'이라는 한자에 익숙할 것이다. 한문학 최고의 권위자인 일본 석학 '시라카와 시즈카'가 쓴 「한자의 기원」에서는 전시의 '펼 전 展'을 주술 도구(장인 공 '工')들을 늘어놓고 악령이 들러붙는 것을 방지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마치 푸닥거리처럼 해석된 전시는 그 이름 아래 어떠한 의도로 봉인해버리는 마술과 같은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회 교육학자는 '박물관은 죽은 자들과 잠시나마 면담할 수 있는 곳'이라며 땅 속에서 끌어낸 묵묵부답의 상대에 대화를 연출하는 큐레이터를 '현대판 영매'라고까지 표현한다. 또한 그의 연출력은 상대 자체의 권위를 딛고 창조에까지 닿아 새로운 권력을 행사한다고 말이다.(전진성 지음, 「박물관의 탄생」 참고)
영매가 늘어놓은 주술 도구들은 유물 혹은 작가이자 작품이다. -작가와 작품은 한 몸이다.- 오늘날의 예술이야 말로 변신술에 능하지 않는가. 노동집약적인 제작기술은 몸과 혼연일체가 되어 몸이 상하면서까지 작품을 만들어내는 장인의 혼과는 일치되지 않는다. 일상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아방가드르적 유희를 즐기는 개념미술가들은 명명 짓기만으로도 우리의 뇌를 혼란에 빠뜨리거나 무릎을 치며 번뜩이는 깨달음의 마술을 부리고 있다. 그들의 마법 부리는 손가락질만으로 우리는 잘 걸어가다가 삐끗거릴 수 있다는 말이다.
전시의 마술성은 전시공간으로서 상징적인 '화이트 큐브' 속에서 이미 드러났다. 시작과 끝이 없는 하얀 육면체 속 거세된 시간과 맥락 끊긴 공간성에서 쓰레기 한점 조차 '내용적으로 소독이 된' 영원성을 부여받는다. '그 속에 놓임'만으로 예술작품이 된 것이다. 한 철학자이자 예언자는 미래인이 '다다(DADA)'의 파편도 주워 전시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다다'는 1915~22년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기존 문명과 양식으로부터 벗어난 탈 정형화된 예술운동이다.- 실제로 프랑스 퐁피듀센터에서는 다다 전시를 2005년 10월에 개최하여 전 세계에 펼쳐져있는 다다와 관련된 온갖 오브제들을 파리로 한껏 모아 퐁피듀센터의 위상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전시는 정의할 수 없는 예술을 지속적으로 형성해주고 있는 하나의 메커니즘이며 이것이 전시 본연의 존립 이유이다. 예술을 장르적으로 구분 지어 회화 공예 디자인 등은 시각예술, 무용 연극 등은 공연예술로 나누어 명명하고, 음악과 같은 시간 예술과 건축과 같은 공간 예술로 나누어 불리며 전시라는 무대에서 등장시킨다. 시각예술이 그간 주요 배우였지만 배우의 장르적 배경에 관한 경계는 이미 흐려졌고 전시장이라는 무대에 다소 난입하는 타 장르 혹은 '무엇이라 정의 못할 어떤 것'의 등장들에 대해서는 입체적이고 직관적인 사고로 그 의미를 꾸준히 음미해볼 필요는 충분하다.
예술대학이나 전문서적에서 배우고 읽히는 전시 담론들은 이해와 편의를 위한 기본적인 정보나 찾을 수 없는 답에 대해 던지는 질문일 뿐 바둑판 돌처럼 내 손으로 쥐어 옮겨지고 읽히는 착한 성질의 것이 더 이상 아니다. 가령 마르셀 뒤샹이 제기한 '반예술'(anti-art)도 명칭은 예술이 아닌 것 같지만 기존 예술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하여 오히려 계보를 이어준 새로운 미술사조이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이미 익숙한 '샘'과 같은 레디메이드 미술이 이에 해당된다. 부정을 하며 탄생하여도 그 기원이 깊어지는 예술은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마술의 묘미이다. 곧 '전시의 힘'이기도 하다. 큐레이터이자 미술이론가인 니꼴라 부리오가 내놓은 '관계 미학(Relational Aesthetics), 포스트 프로덕션(Post-production), 레디 컨트(Radicant), 엑스 폼(Ex-form)' 등의 용어들은 동시대 예술에 대해 정의 내려보고 그 과정을 부지런히 쫓아가고 있는 흔적들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아직도 예술의 주파수는 '미(美)'를 향하고 있는가? 지극히 지적인 개인의 취향, 세계와의 특정한 관계맺기, 집요한 관찰과 독특한 습성, 예술 경계에 대한 파괴심 혹은 반사회적 참여과정이 예술을 재정의하고 있다. '예술'이라는 말이 예술가들의 작업(Art work)에서 이미 평가와 정의가 완료된 위대한 예술품을 일컫는 것 같아 이 지점들을 모두 담아낼 용어로써 '예술적 실천들'(artistic practices)로 대체 사용하여 '정의 중인 예술'에 그 생생함을 더하고자 한다.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울 수도, 하지만 다분히 정치적인, 마치 예술의 거푸집과 같은 전시 이야기는 다음 메모들로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