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코로나로 당황스러웠던 작년, 을지로 상업화랑에서 2020년 3월 11일에서 3월 29일 펼쳐졌던 권자연 작가의 개인전 <그의 산> 전시 준비로 작가를 만나 쓰게된 서문을 소개한다.
코로나 가운데 있지만 작년을 생각해보면 코로나에 대해 우리가 이미 겪어온 바이러스 수준에서 가장 지독하게 언급되었던 사스나 메르스 정도로만 생각했다. 작년에 쓴 이 서문을 들춰 읽으며 막연하게 길어야 몇달 후면 곧 역병이 끝날 것이라는 태연하고 설익은 생각이 함께 떠올라 크게 숨을 내뱉으며 아래 글을 저장한다. 전시 중에 찍어둔 현장 이미지와 함께.
"정상에서는 수평선까지 펼쳐져 있는 산맥을 볼 수 있다. 바위는 하늘과 만나고, 둘 다 푸른빛이어서 모든 차이를 약화시킨다. 남쪽으로는 알뜰하게 경작되고 있는 서양 자두 빛깔을 띤 평야도 볼 수 있다. 이것은 무덤의 광경과 대조된다. 흰 구름 그림자가 평야를 건너간다. 그림자가 있는 곳의 빛은 월계수 잎의 초록이다. 작은 구름 수백 개로 구성된 이 구름은 느릿하고 편안하다. 마치 그 산이 그들 모두의 조상이기라도 한 것처럼." - 존 버거, 『시각의 의미』 중에서
회상하기 위해 누군가는 글을 쓰고, 누군가는 그 때의 장소를 그린다. 어렴풋한 기억을 따라가기도 하고 길을 잃은 그 자리에서 장소를 온 몸으로 느끼며 공간의 정서를 작품으로 불러일으키는 작가 권자연이 있다.
그녀의 작품세계에서 「He」 시리즈 그 두 번째로서 이번 전시는 아버지 '그'의 산을 주제로 다룬다. 작가 노트에 따르면 '그'라는 존재는 그냥 살다간 한사람에 불과한 것이 아닌, 이 역사에 이 순간의 우리를 살게 한 중요한 개인이다. 지금도 당신의 공간에는 다 알지 못한 채 담겨있는 역사들로 우리는 '그 어떤 장소'에 살고 있다. 장소와 사건 등을 기억해내는 것은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인간의 기술이다. 기억술은 변증가가 메모를 하지 않고 레토릭-rhetoric 수사학-으로서 지적이고 긴 구술을 하기 위해 등장하였다. 이 고전적이고 인간 본능에 기입된 기술을 방법으로 권자연 작가는 발견하고 수집하며 작업 언어를 진술해내고 있다.
이번 작품들에서 주로 표출된 조형적 이미지는 산, 원, 별이다.
아버지는 노래하는 꿈을 꿨다. 노래하기 위해 곧잘 산을 올랐다. 현실은 노래하는 꿈의 실현을 허락하지 않더라도 아버지의 노래하는 소리를 조용히 들어주었을 산. 그만의 산이 되는 순간의 경관. 눈부시게 비춘 햇살에 음영을 품은 잎사귀들로 표상된 수많은 원들, 그 꿈과 찰나가 알알이 별로 응고되어 떨어진 별 무덤.
부재하는 것을 더듬어가는 권자연 작가는 기억술에 의한 작업방식과 함께 기록적 속성을 가진 장소를 연필이나 볼펜으로 계속 그려내기도 하는데 이는 면을 생략하고 익숙한 선을 중단하고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말한 추상표현주의와 같이 선험적 경험에 의해 화가로서 이미 태어날 때부터 지닌 비재현적이고 비기표적인 혼잡한 감각들의 묘사선들을 그려나간다. 작가만이 화폭 위에 이 혼돈을 시작하고 순수 감각의 지시에 따라 손을 멈춰 마무리 짓는 드로잉들의 자태는 그녀가 자아내는 회화적 행위이다. 시각적 구조체들은 비정형화되어 불러일으키는 장소와 화폭 사이 이질동형의 관계적 닮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숲의 나뭇잎 하나하나 옮겨 채집하듯 연필로 원을 그려내고, 매만져 도자로 별을 굽고 쌓아올려 무덤을 만들고, 두 개의 별로 화폭을 받히는 그녀의 작품 방식. 느낌과 정서를 시각적으로 옮긴다는 것은 사태와 현상을 고스란히 일치시키는 정면성의 세밀한 재현 방식보다 오히려 회화적이고 서정적인 효과를 갖는다.
아버지 시대가 개인의 삶 보다 공동체와 가족을 위해 살아간 경험들은 우리 시대로 연결되어 공통감각으로 전이되어 우리가 삶을 대하는 것에 위안과 공명을 일으킨다. 그 내밀하고 단단한 심급의 감정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그의 산'과 같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마치 그 산이 우리 모두의 조상이기라도 한 것처럼' 저변의 이야기를 품고 앞으로 나아가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