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라도 여행을-아기와 크로아티아 여행> 들어가며
크로아티아! 계속 가고 싶은 나라.. 머릿속에서 자주 여행 가는 나라.
크로아티아 여행을 계획하게 된 배경은 육아휴직 전까지 십 년을 훌쩍 넘게 일에 연연하며 워커홀릭처럼 지내온 내게 힐링의 여행지로서 건넨 신랑의 추천 지역이었다. 이런 여행을 계획한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동시대 미술 비엔날레나 페어를 보러 유럽여행만 계획해 온 내게 단지 쉬기 위해서 여행을 간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여행과는 전혀 다른 목적이었다. 여행지를 정하기 전에 신랑에게 질문은 가면 뭐가 좋은 지였는데 그냥 자연이 좋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자연만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까. 사실 자연에서 위로받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몸이었다. 머리는 풀가동으로 계속 돌아가고 있고 이를 돌려주는 원동력은 시각적 이미지들이었다. 예술가들의 생각들로 만들어진 예술 작품들로 경험하지 못한 미적 경험이나 생각해보지 못한 지점들을 지긋이 자극해주면 머리가 맑아지고 상쾌감을 느껴왔다.
이런 여행 습성을 갖고 사전지식이 전혀없는 동유럽에서 힐링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많았고 현지에 가서 그냥 앉아있고 그냥 시간을 흘러 보내는 것에 상당한 불편함을 가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쉬러 간 여행인데 스케줄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신랑과 다툼도 일어나고 쉬지 못하는 몸을 끌고 흐르는 시간 속에서 무엇이든 해내려고 발버둥 치는 내가 오히려 공회전을 하며 에너지 낭비를 하는 고장 난 차같이 느껴졌다. 시각예술을 십수 년간 접하면서 어찌 보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특수 훈련이 되어있는 눈을 가진 채 말이다.
이번 여행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형용해보자면..
해가 사물을 비춰내는 힘
바다 물결에 부서지는 햇살
물 깊이를 숨기는 투명함의 농간
각자 쓰던 시간을 함께 보낼 때 시간의 무용함
이유 없는 머무름
편안함의 본모습
어른보다 풍성한 아기의 시선, 그대로 본다는 것
그리고
생후 20개월에 갓 들어선 아기가 여행 동반자였다.
특. 수. 상. 황.
나의 여행 동반자를 떠올려본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여 기저귀가 느껴지게 아장아장 통통 뛰어오르며 걸어 다니는 아기, 백 미터도 못 가서 걸음 에너지가 방전되는 아기, 주로 아기띠에 매달려 잠드는 아기, 아직 자기 의사를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아기, 옹알이를 시작한 아기, 그래도 자기 의사는 확실해서 오래된 성에서도 천장화를 보라고 가리킬 줄 아는 아기, 젖병을 떼고 이제 이유식을 먹을 수 있는 아기, 모닝빵, 식전 빵, 크루아상을 좋아하고 피자 둘레 바삭 구워진 도우만 좋아하는 아기, 기저귀를 착용하는 아기, 낮잠을 주기적으로 자는 아기, 잘 때 쪽쪽이를 물어야 안정감을 찾는 아기, 침대에서 떨어질까 봐 못 재우는 아기, 비눗방울을 매우 좋아하는 아기, 뽀로로 크롱 가방을 메고 걷는 것이 스스로 대견하다고 생각하는 아기, 세상에 버스와 기차가 있다는 걸 알기 전에 먼저 접한 '타요' 만화,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는 애니메이션 '아기 상어'- 신기하게 두브로브니크 에어비앤비 숙소 TV에서 베이비 샤크가 나왔다. 시차가 뒤엉켜있는 상황에 큰 도움이 되었다- , 어려움에 처했을 때 만능으로 도움을 주는 '뚝딱 맨', 뭔가 애기 눈에 악당을 물리치며 의로워 보이는 '번개맨', 만화를 보지는 않지만 잘 때는 '뽀로로' 자장가를 들으며 잠드는 아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기, 밥 먹을 때 입에 묻는 걸 굉장히 싫어해서 닦아주며 먹여야 하는 아기. 쪽쪽이 빠는 맛을 알고 이제는 쪽쪽이 없이 잠을 시작조차 안 하려는 아기. 울 때 안정감을 찾을 때도 쪽쪽이를 찾는 아기.
쌀을 구하기 어려울 것 같아 레토르트 형태로 개별 포장된 휴대용 이유식 더미와 계속 쓰던 브랜드의 기저귀 더미를 여행가방 속 짐의 제일 큰 비중으로 두고, 세탁하며 입을 옷가지 세네 벌과 추위에 덮을 점퍼를 챙겨 현지에서 음식은 되는대로 해결하기로 하고 우리의 여행은 변경 불가한 항공 티켓을 구매하면서 순식간에 시작됐다.
이미 격하게 느껴버린 무용의 생활에 급제동을 걸어 육아휴직을 하고도 한 개인으로서 질주할 곳이 필요했고, 퇴사라는 정리와 프리랜서의 길로 인도해준 내적 기반이 되어준 여행.
옳았고 그때여야 했던 여행.
내 안에서 수없이 나만 바라보다가 끄집어내서 타인을 보게 된 계기이다.
동유럽 여행을 언제 다녀왔나 싶게 만 3년 전을 향하여 시간은 흐르고 있다.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에어비앤비 숙소 밖은 자연 그 자체로 인공의 빛 한점 없이 쏟아질 듯한 별 무리들로 내가 서 있는 곳이 푸른 별 지구임을 인지시켜줬고, 처음 발이 닿은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올드 타운의 길거리는 중세 영화 세트장을 걷는 꿈과 같이 여러 시간대가 얽혀있었고, 우리나라와 다른 암흑의 밤들과 극명한 낮의 햇살과 그 햇살을 흠뻑 적시는 중세도시 종소리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것이 꿈속에 있었던 일인가 싶게 그것들은 가히 아마득하지만 분명 있던 일이었다고 안개 걷히듯 세밀하게 떠오른다. 시간의 밀물과 썰물처럼 시간을 거두어가며 이야기를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