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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로디 옹그 Mar 19. 2022

전시 <중간계 : 생-산> 나가며(1)

기획자의 참여예술가 작품 곱씹기 "양아치 작가"

보통 전시서문 '들어가며'를 쓰고 끝내는 전시 기획 큐레이터의 후담을 적어내려보려고 한다. 숨 가쁘게 시간 맞춰 이벤트성 행사 치루듯 / 어쩔땐 보따리 장사꾼 같이 / 청소도 했다가 글도 썼다가 작품 설치도 고민했다가 민원도 응대했다가 지원기관 제출자료도 뚝딱 만들어냈다가 관객들도 응대했다가 예술인보험금 신청하며 공단에 문의도 했다가 세금 신고방법을 몰라 세무서에 전화도 했다가 등등 / 마치 견고한 회로도에 모든 전선을 혼자 꽂아야하는 치밀함과 순발력을 필요로 하는 독립큐레이터의 전시를 스스로 천천히 곱씹어 보는 일이 이제는 가능할 것 같다. 참여예술가들의 행보에 1센치의 도움이 되도록 전시 기간 중 확진자가 되어 참여예술가들과도 격리되었던 나의 생각을 글로 전달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창작행위를 담아낼 제목을 정하여 작가를 섭외하고 작품을 만들며 나눈 이야기들, 작업이 작품으로 되는 목격담, 작가를 향한 애정어린 마음 속 응원과 주제를 반추하며 무엇이 ‘생-산’인지 작품들을 통해 고민한다. 신실재론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존재론적 기술주의 테제로서 ‘존재하는 것은 항상 이러이러하며 저러저러한 어떤 것이다.’라고 말했듯 ‘이렇고 저렇고 그렇고한’ 개별화되어있는 현실세계를 ‘중간계’에 투사하여 등장시킨 예술 작품들을 감각하며 답십리 전시장에 와준 관객부터 도록 이미지들, 공간VR 전시만을 통해 접한 관객들까지 함께 공유해보고자 전시 동선을 반대로 주출입구를 향해 나가며 적어내린 기획자의 글이다. 


지각불가능한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정보로 가득한 현실세계는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는가? 글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어떤 존재방식을 취하며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가? 과학으로 증빙되고 기술로 해명된 현실세계는 사실인가? 해석은 인류세와 예술에서 어떤 우를 범하였는가? 예술이 운명 지어지는 곳은 무엇들을 출석시키는가? 신비와 진리는 어떤 관계인가? 진실은 진리인가? 감각하는 것에 매달려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가? 신체 활동을 모두 감각하는가? 아직도 풀리지 못한 질문들이 산재해있다.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의 초대 

햇살은 일정하고 사십 년전 분위기는 공기로 저장되어 있다. 시간의 항상성. 답십리 고미술상가를 일층에 둔 전시장소 이랜드 구 패션사옥 2층 유휴 공간은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이 상태를 유지해왔는가. 바닥의 요구르트 병은 수십 년간 누구의 손으로도 잡아 채어지지 못했다. 천장으로부터 한쪽은 끊겨 간신히 한 줄에 매달려있는 ‘우븐AS’ 간판, 여기저기 천장 누수로 빗물을 유도하기 위해 놓아진 골드버그형 장치와 같이 연이어 이어져있는 플라스틱 파이프들, 빗물을 담기위한 노골적인 플라스틱 통들, 더이상 송출 안되는 방송용 스피커, 벽에 기대어져있는 킴스클럽 간판, 여기저기 끊겨진 채 사방으로 삐져나와 천장으로부터 늘어져 터져나온 각종 전기선들, 바닥에서 잡초 자라듯 마구잡이로 올라와 끊겨있는 철근들, 반복적 건습활동으로 합판 형체만 유지하고 있는 가루들. 대롱거리는 전기선이나 우후죽순 솓아있는 철근들은 위 아래로 사람에 갈증난 듯 우발적 관계를 기다리는 듯 봉인되어있는 사물들이다. 수 겹의 흙 먼지가 나타내는 발자국들에 당신의 발자국은 새로운 기록을 새긴다. 응고된 시간의 사물 공간에 예술이 들어와 그 다음으로 들어오는 신체인 관객 스스로 감각하게 하기 위하여 생-산, 포이에시스 Poiesis를 시작한다. 


전시장 정 중앙에서 마중 나온 샹들리에 조명, 가짜 새, 진동 사운드, 멀리서 들려오는 허밍 같은 음들, ‘딸깍’ 조명이 내는 제 할일의 소리, 가짜 초밥의 움직임, 라이더 촬영 영상 속 거칠고 중저음의 사운드, 깃발, 햇살에 드러난 부유하는 먼지 입자들, 의자들, 그리고 건물 밖 차와 사람들 소리


개별 사물의 속성으로 짐작할 정도의 흔적, 그 짐작 속에서 가설된 사물의 질서, ‘사물들이 쓴 공간적 문법 Spacial grammar written with Things’에 따라 양아치 작가는 특정 의미없는 사물들을 '볼 수 없는 원근법'으로 배치한다. 가령, 이 공간에 위치해 온 그 의자의 좌표 그대로, 그 의자 형상을 따라 생기는 그림자 그대로, 그 그림자 다음으로 작가의 ‘가장 최소한의 사물’이 배치된다. 미술은 사물 Object에 있어 미니멀리즘의 역사를 갖고 있다. 도날드 저드의 ‘특수한 사물 Specific Objects’ 선언과 같이 공격적인 방식으로 공간을 특정하고 활성화 시키기를 반복하지는 않지만 작품에 대한 해석, 특정 설명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점은 육십 년전 미술사적 맥락을 환기시킨다. 하지만 여전히 사물은 실재 세계에서 전체와 사실들을 논하는 방식으로 존재해오면서 기술론으로 인과성이 합일되는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에 국한되어있다.  오히려 이로부터 벗어난 (작가 제목에 따른) ‘모순세계’가 비실재 오브젝트인 개별적 사물을 맞이하는 진실의 순간이고 이 순간을 함께 포착하고자 작가는 관객을 초대한 다. 이러한 작가의 재치는 그의 미학적 입장이 작업으로서 발현된 순간이기도 하다. 

물리적 층위인 글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그대로 부재시켜둔 채, 그것이 진리의 신비론에서는 당연한 이치이기에, 작품 제목 <Object가 현실세계에 응대하고 있을 사이, Unreal Object가 모순세계에 응대하고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아래 하나의 장면이자 풍경으로서 포이에시스적 행위를 펼친다. 신비의 요소와 사물들 개별간의 속성을 염두한 신실재론 New Realism 맥락에서 사물들은 더이상 모더니즘 산업영역의 ‘사물 object’이 아닌 네트워크 속 개별 속성을 띈 ‘체 corps’를 가진 ‘사물-체 Thing’로 어휘를 달리해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으로 안내한다. 또한 사물들이 써놓은 공간적 문법 아래 개별 세계에서 만들어지는 연금술적 생-산이 개별 신체, 관객의 입장하에 유효함을 발견한다. 

전시장을 대면하는 첫번째 신체이자 첫번째 관객으로서 큐레이터는 시공간과 빛 가운데 배치를 창안해내기 위해 전적으로 집중하는 작가를 관찰하는 기획자이자 어느 속성을 채취해내고 어느 성질 값에 예민해하는지 헤아려주는 동료이다. 작가는 말한다. ‘미술이 친절한 적이 있었냐’고. 기획자는 동의한다. 그리고 모든 것에 불구하고 신체를 초대한다. 해석에 반대하는 수잔손택도 말하지 않았는 가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 erotics이다.” 잘 보고 잘 듣고 잘 느껴보자.


답십리 전시장 양아치 작가 작품 설치 현장 이미지, 사진 강민정
답십리 전시장 양아치 작가 작품 설치 현장 이미지, 사진 강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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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예예술가 양아치 작가가 설명해주는 중간계:생-산 작품

https://youtu.be/9iqcKTPKIW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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