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고통스러웠으나 충분히 행복했다고

by 이현선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그러나 한 사람의 부재는 제법 큰 민폐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람들 속에서. 그냥 그 모든 소속과 관계 사이에서 한 사람이 사라질 때 그 한 사람만큼의 역할, 존재, 모든 의미들.

사람이 죽을 때는 대체로 돈도 많이 든다. 장정일 선생도 그의 시 ‘구매자’에서 '살아생전 온갖 상품의 구매자였던 당신 / 당신은 죽어 비로소 / 영원한 구매자가 된다 / (그야말로 뼈만 남는다)' 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을 보내는 데 체력과 감정도 엄청나게 들어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국엔 태어나지 않는 게 제일 나았다는 식의 결론에 도달하고 싶지는 않다.


대체로 고통스러웠으나 충분히 행복했다. 돌이켜볼 때에 이 정도 느낌이 든다면 무엇보다 좋겠다. 그 무엇도 나를 좀 힘들게 만들 수 있어도 불행하게 만들 순 없다.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든 행복할 수 있다.

어디에서는 내 병이 환자가 너무 늘어서 이젠 희귀병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병인데 힘들겠네요. 완치될 수 있길 바랍니다. 힘내세요.' 라고 말한다. 그럼 또 누구는 '완치되는 병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고 그럼 또 누구는 '저도 같은 병이 있는데 이제 완치되어 잘 삽니다.' 라고 말한다...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머리가 아프다.


또다시 머리를 여는 수술을 앞두고 속이 시끄러운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아주 많은 경우에 그냥 물 한 잔 마시고 일찍 자는 게 가장 이롭다. 푹 자야지. 내일도 출근해야 한다. 내일은 좀 바쁜 날이 될 것 같지만 열심히 일해야지 별 수 있나. 일할 수 있는 것은 언제까지일까. 운전은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뭐든지 혼자 해내려고 하는 습관은 득이 될까 독이 될까.


오늘의 할 일은 나에게 미루지만 오늘의 고민은 분리수거도 안 된다. 일반 쓰레기로 내다 버리자. 최근 몇 년간 주변인을 대상으로 한 나의 앙케이트 주제는 '무슨 낙으로 살아?' 였다.

요즘은 조금 달라졌다. '만약 네가 1년 후에 죽는다면 뭘 하겠어?'.

두 개의 질문은 글쎄,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