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식 4

by 강소하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경식은 아무 대답도 없이 뒤를 돌아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남겨진 영원과 진운은 운 좋게 넘어간 것인지 상황이 더 심각해진 것인지 감이 안 잡혀 섣불리 뒤를 따라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눈치를 보며 주춤거리고 있을 모습들을 생각하니 조금은 가엽고 안타까운 것 같기도 했다. 훈련을 할 곳이 없어서 이렇게 먼 산까지 올라오는 것일 테니. 결국 마음이 약해져 뒷짐을 진 채 슬쩍 뒤돌아보자 그제서야 냉큼 산길을 내려오는 게 어린 망아지 같았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자 경식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잘못한 건 알고 있는지 줄곧 멀찍이 떨어져 걷던 영원과 진운이 경식의 옆으로 은근슬쩍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둘의 사이에 서서 걷게 된 경식이 불쑥 입을 열었다.

“해가 지기 전에 산에서 내려와야 하는 이유가 뭐라고 그랬지?”

영원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아마 섣불리 경식에게 다가간 걸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경식이 눈을 허옇게 뜨며 눈치를 주자 영원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해 진 후 산에 남아 있으면 발각 위험이 있어서입니다.”

“그걸 아는 놈들이 해 다 지도록 체술을 훈련하다 산에서 내려오나.”

“죄송합니다.”

영원과 진운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만세운동 이후로 길거리에서 총칼 휘두르고 다니는 놈들은 분명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지. 만세만 외치던 사람들을 때려 죽인 놈들이야. 그리 쉽게 폭력을 포기하지 않아.”

저 멀리 산의 입구가 보였다. 아까 경식과 마주쳤던 어린아이도 들어갔는지 사방이 인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경식은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살피며 앞장서 걸어갔다.

“경찰이 많아졌어. 조금만 길거리를 유심히 살펴도 알 수 있다. 감시하는 눈이 예전보다 늘어났어.”

“죄송합니다.”

진운이 왼편에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던 첫 반성과는 달리 조금 침울해진 목소리에 경식은 준비해 온 일장연설을 절반으로 줄이기로 했다.

“발각은 죽음이다. 너희 하나만 걸리고 끝나는 문제가 아냐. 의심이 커지기 시작하면 조직이 위험해질 수도 있고, 그 조직은 우리 월성회만이 아닐 수도 있어. 우리는 혼자 싸우고 있는 게 아니야.”

이번에 한 말은 둘에게 상당히 와닿는 듯했다. 모두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말에 영원의 눈빛이 일렁이는 달빛처럼 흔들렸다. 그 눈동자를 보며 경식은 과묵한 영원 또한 결국은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꾸중을 들으면 의기소침해지고 가끔은 실수를 할 수 있는 열아홉의 아이. 하얗다 못한 창백한 얼굴을 보면 그를 처음 마주했던 밤이 떠올랐다. 지금보다 조금 앳되었던 영원의 얼굴은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슬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화가 난 것 같았다. 경식은 그에게 따뜻한 물과 부드러운 손수건을 내밀었다.

영원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날의 화를 못 이겨 눈물에 젖은 얼굴과 지금의 무심한 얼굴은 땅과 하늘만큼이나 큰 차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경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앳되고 어리고 화가 난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영원은 슬픔이나 분노를 넘어선 것이 아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감정을 눌러담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명원이 영원을 데리고 월성회에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끓어오르는 화를 감내하지 못해 폭발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더라면 월성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행히 강도 높은 훈련과 간간히 나가는 작전 덕분에 조금이나마 화를 해소하고 있는 듯했지만 가끔 새카맣게 물드는 그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경식은 착잡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 그것도 월성회의 대장씩이나 되어서 자신의 불안을 영원에게 내보일 수는 없었다. 경식은 영원의 어깨에 턱 손을 올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너희 둘, 아까 지키는 연습을 하러 왔다고 말했지.”

영원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식은 영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달려드는 것과 숨죽이는 것, 이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있어야 한다. 너희는 달려드는 데만 온 힘을 다하지만 숨죽이는 연습도 해야 해. 그래야만 제대로 지킬 수 있는 거야.”

영원과 진운은 산을 빠져나와 안경원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월성회 단원 중에서도 가장 말수가 적은 두 사람이었기에 화기애애한 귀갓길이 되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야단을 쳤나 걱정스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안경원 문을 열자마자 뛰쳐나와 신나게 반겨 주는 용맹이 덕분에 경식은 한숨 돌렸다. 우진이 한숨을 포옥 쉬며 세 사람을 맞이하러 나왔다.

“잔뜩 혼나고 왔죠? 아니, 그러게 두 사람은 왜 또…….”

영원이 스윽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칼이 치렁치렁하게 늘어져서 제법 억울한 사연을 가진 귀신처럼 보였다. 그 머리칼에 가리운 표정은 영원의 맞은편에 서 있었던 우진만이 불 수 있었겠으나 기겁하며 윤새 뒤로 쏙 숨어버리는 모습으로 보아 꽤 살벌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진이 믿고 의지하려 했던 윤새조차 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저씨가 알아서 잘 말씀하셨겠지. 너는 참…… 시비를 걸기는 왜 걸어.”

윤새는 억울하다며 우는 소리를 내는 우진을 떼어내다 뒤이어 들어오는 진운의 어깨에 이마를 박을 뻔했다. 진운이 슬쩍 몸을 뒤로 빼며 휘청거리는 윤새를 피했다. 경식은 팔짱을 끼고 서먹해 보이는 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참으로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였다. 굳이 잘잘못을 가린다면 일방적으로 진운이 윤새에게 몹쓸짓을 한 것이 맞았다. 잘하면 평생의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었던 사진관 일에서 쫓겨나게 만들었으니까. 그럼에도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윤새가 가만히 있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자금 조달 작전 이후로 그는 오히려 진운을 향한 화가 수그러든 듯했다. 그를 쳐다보는 눈빛이 이제는 날이 서 있다기보다는 떨떠름해 보였다. 무엇이 그리 떨떠름한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저놈들 때문에 간만에 산 탔더니 배고파 죽겠다. 어서 저녁이나 들자.”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우진이 냉큼 경식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경식은 진열대 뒤의 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가 김치와 나물을 담는 사이 우진은 밥솥 앞에 쭈그려 앉아 열심히 밥을 펐다. 밥의 양만 보아도 밥그릇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그릇 위로 밥이 솟아오를 만큼 많이 먹는 대식가가 명원이요, 딱 그릇 높이까지만 꽉 차게 먹는 것이 영원이다.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이 우진이다. 윤새와 진운은 거의 비슷하게 먹는다. 가장 덜 먹는 것이 경식이었다. 우진은 주걱에 묻은 밥톨까지 야무지게 떼어먹고 구석에 세워진 간이식탁을 꺼내와 펼쳤다. 그가 하얀 김이 솟아오르는 밥그릇들을 동그랗게 배치하는 동안 경식은 그 중간에 나물과 김치를 놓았다. 잠깐 쭈그려 앉았다고 쑤셔오는 무릎을 퉁퉁 치고 있으니 명원이 들어오며 말했다.

“아저씨, 또 무릎 아프세요? 수저는 제가 놓을게요.”

명원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까치발을 들고 수저통이 있는 선반으로 팔을 쭈욱 뻗었다. 그 모습을 보던 우진은 돕고 싶었는지 몸을 일으켰지만 손쉽게 수저통을 꺼내는 모습에 다시 조용히 앉았다.

“아, 내가 좋아하는 시금치 나물.”

영원이 들어오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누가 보면 작전 이야기하는 줄 알겠어요. 시금치 이야기를 왜 그렇게 진지하게 말해요?”

윤새가 웃으며 영원을 툭 쳤다. 당황한 영원은 무어라 대답을 해 보려 입을 벙긋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경식은 모두가 앉고 나서 진운과 윤새 사이에 끼어 앉았다. 둘이 옆에 앉아서 밥을 먹는 어색한 광경을 볼 바에는 자신이 중간에 끼는 것이 나았다. 수저를 들자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서로 못 볼 꼴 다 본 사이라도 웃어른 앞에서 예의범절은 지키려는 모양이었다. 경식이 밥을 한 술 뜨자 기다렸다는 듯 수저와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방을 채웠다.

“멸치는 다 먹은 거죠?”

우진이 밥을 우걱우걱 씹으며 말했다.

“왜, 먹고 싶어?”

당장이라도 목이 콱 막힐 것 같은 모습에 경식이 물잔을 건네며 물었다.

“아뇨, 그건 아니고. 멸치가 뼈랑 관절에 좋다잖아요. 대장은 무릎이 안 좋으니까.”

“얼씨구?”

웃어넘겼지만 경식은 내심 우진이 기특했다. 우진은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키야아’ 하는 소리를 내며 잔을 내려놓았다.

“뭐 하나 여쭈어 봐도 됩니까?”

이번에는 윤새가 화두를 던졌다. 경식은 밥을 한 술 떠 입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 무릎이 낫지는 않는 겁니까?”

전혀 돌려 말할 생각이 없는 화법에 경식은 당황해서 눈을 끔벅거렸다. 그가 어디서부터 설명해 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명원이 나섰다.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얻은 상처만 나아요. 무릎이 쑤신 건 외부에 의해 생긴 증상이 아니니 다시 살아나도 똑같이 쑤신 거고요. 으음, 어쩌면 나이 때문일지도…….”

“얌마, 최명원.”

명원이 잘못한 강아지처럼 눈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러세요, 맞는 말인데.”

우진이 경식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경식의 마음에 미약한 흠집이 났으나 덕분에 분위기는 제대로 풀렸다. 간만의 편안한 식사였다. 경식은 밥알을 씹어삼키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가끔 서로에게 반찬을 덜어 주기도 하는 아이들을 남몰래 둘러보았다. 명원이 재잘거리면 윤새가 그에 두어마디 얹으며 화답하고, 우진이 질세라 끼어들어 종알거리면 명원이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 모습이 은근히 재미있는지 피식 웃어 놓고 금방 아닌 척 숟가락을 입에 무는 영원의 모습은 경식만 보았을 것이다. 다만 옆에 있는 진운이 아까부터 아무 말도 없는 것이 신경이 쓰였다. 그는 평소에도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오늘따라 더 과묵했다. 산에서 너무 심하게 혼을 낸 것인지 경식이 고민하던 찰나 진운이 바람 새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작은 미소에도 ‘아이고 다행이다’ 하는 생각이 드는 자신이 경식은 신기했다.

아이들. 자신도 모르게 방금 아이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 경식보다 한참 어린 아이들이었다. 저 다섯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경식이 나서서 해결해 줄 것이고,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목숨을 바쳐 살릴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윤새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자신이 숟가락을 반쯤 든 채 멈추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과 달리 의심보다는 걱정이 조금 더 스민 시선에 경식은 됐다고 손짓하며 숟가락으로 얼마 안 남은 밥을 긁었다. 윤새는 고개를 까딱 끄덕이고 모른 척 말을 시키는 명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지이기 전에 아이들인가, 혹은 아이들이기 전에 동지인가. 애써 외면해왔던 질문은 이리도 평범하고 아늑한 순간에 다시 그를 괴롭힌다. 그는 때가 오면 죽을 기회를 줄 것이라 진운에게 말했었다. 별의 조각을 품고 태어난 그들은 분명 언젠가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 순간은 아주 비장하고 결정적일 수도 있고, 반대로 허무할 정도로 사사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숨쉬는 동안은 그 마지막 순간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여섯 중에서 그 마지막 순간을 몇 번이고 겪을 수 있는 건 경식뿐이었다. 그건 경식의 삶에 주어진 몇 안 되는 행운이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 앞에 있는 이들을 위해 그 행운을 사용하리라고 오래 전 성천의 눈을 보며 맹세했다. 다만 그 맹세가 진정으로 눈앞의 아이들을 위한 마음이던가.

차라리 광복이 정해진 미래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더라면 목숨을 바치리라 결심할 수 있었을까. 가장 많은 진실을 알고 있는 성천조차 명확한 미래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자신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남들보다 아주 조금 구체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은 아주 느릴지라도 옳은 방향으로 흐른다고도 말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조선의 독립은 정해진 미래인가. 그 답을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성천은 오래 전 절벽 밑으로 영영 사라졌다.

“그래도 경식 아저씨가 있어서 다행이죠?”

우진이 불쑥 말했다. 생각의 수렁에 빠져 있던 경식은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술을 뜨며 대답했다.

“알면 다행이다.”

“제가 보았을 때 우린 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앞뒤 안 재고 튀어나가는 사람들이거든요.”

“나도?”

윤새가 다소 놀란 눈빛으로 우진에게 물어보았다.

“누나는 좀 재고 신중하게 튀어나가기는 하죠. 하지만 어쨌든 튀어나가잖아요.”

윤새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은 공손하게 손바닥으로 경식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우리 고삐인 셈이죠.”

“우진이 너 아저씨한테 크게 잘못한 게 있어? 오늘따라 왜 이래.”

묵묵히 밥을 먹고 있던 진운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니거든요. 그냥 새삼스러운 거지…….”

우진은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손을 거두고 괜히 숟가락으로 얼마 안 남은 밥을 긁었다. 뒤늦게 낯간지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더 놀리고 싶어졌는지 진운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가고 있었다. 간만에 보는 소년스러운 미소였다.

“무어가 그리 새삼스러운데?”

진운이 목소리를 낮추고 구슬리듯 묻자 윤새가 경악한 표정으로 퍼뜩 고개를 들었다. 경식은 윤새가 소름이 돋은 팔을 연신 쓸어내리는 것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아, 이렇게 같이 저녁 먹는 거요. 그냥 같이 있는 거요!”

진운의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말투 때문에 민망함을 이겨내지 못한 우진이 머리를 쥐어뜯다가 바락 외쳤다. 염불을 외듯 대답할 때까지 반복해서 물어보던 진운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둥그런 식탁에 둥그렇게 모여 앉은 사람들이 전부 둥그래진 눈으로 우진을 쳐다보았다. 우진이 말하기 전까지는 함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경식은 한순간에 조용해진 식탁을 휘이 둘러보다 토끼눈을 한 영원과 눈이 마주쳤다. 영원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평소의 나른해 보이는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눈동자를 데룩 굴려 눈짓을 했다. 무엇인가 싶어 시선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제발 구해 달라고 쳐다보고 있는 우진이 보였다. 그렇잖아도 곱슬거리고 남들에 비해 색소가 옅은 머리칼 때문에 강아지가 인간으로 둔갑한 것처럼 보이는 우진인데, 팔자 눈썹을 하고 쌍꺼풀 없이 순한 눈을 끔벅이니 정말로 구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분위기에서 어떻게. 경식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뒤 겨우 입을 열었다.

“그렇지, 우리 지금 같이 있지.”

그러나 그렇게 말을 뱉고 나니 경식 또한 갑자기 둘러앉은 이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실감이 나는 것이었다. 사람 여섯이 모인 이 작은 방이 왜인지 세상의 전부라는 착각이 들었다. 말똥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들과 영원히 이 방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고자 하는 충동이 들었다. 그렇게라도 이 새삼스러운 순간을 유지하고 싶었다. 흘러가는 순간을 굳혀 액자 속에 영원히 담아 둘 수 있다면.

“감사한 줄 알자고.”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경식은 가볍게 흘려보내듯 말했다. 다만 그 스스로도 깨닫고 있었다. 이 순간을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리라는 것을. 이 평범하고 낯간지러운 순간이 그리워질 것을. 언젠가 이 순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날이 찾아오리라. 그리고 그건 식탁에 둘러앉은 모두가 오래 전부터 깨달아온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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