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죽음을 잘했으니, 나도 잘하겠지
할머니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죽게 되면’ ‘나 죽으면’ ‘빨리 죽어야지’라는 말. 우리 할머니는 한 번도 그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턴가 무거운 자연의 질서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듯 그 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또 언제 보겠나’ 라며 눈물 바람을 하는 날도 생겨났다. 다가올 이별은 막을 도리가 없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에이, 그런 말 마’ ‘무슨 그런 말을 해’라는 것뿐. ‘죽지 않을 거야’라고 말할 순 없으니 그만 말문이 콱 막혀버리고 만다.
할머니는 어떤 답을 기대하는 걸까? 우리가 어떻게 말해야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까. 죽음이 멀지 않았으니 이별을 잘 준비해 보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자주 보자는 말인 걸까. 아니면, 부모를 보내며 겪었던 순간들이 떠올라 미리 예고편을 날리는 걸까. 할머니 나이가 되면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될는지.
누가 언제 죽었고, 몇 명이 남아 있는지를 헤아려보는 것이 어른들의 안부 인사. 누구는 치매에 걸려서 아무도 못 알아본다더라. 누구는 갑자기 쓰러져서 죽었다더라. 누구는 더 이상 거동이 어려워 요양원에 갔다더라. 함께 시간을 쌓아온 이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할머니는 아마 저 뒤로 미뤄뒀던 세상과의, 우리와의 이별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깊이 체감했을 것이다.
언젠가 할머니는 ‘부모가 죽음을 잘했으니 나도 잘하겠지.’라고 말했다. 보통 엄마를 따라간다는 입덧처럼, 죽음 역시 무사히 지나가겠거니 어림짐작하는 것 같았다. 내 부모가 그럭저럭 잘 해냈으니, 나 역시도 아마 그렇지 않겠느냐고.
무서운 주사를 맞을 때 엄마들이 ‘선생님, 덜 아프게 놔주세요.’ 그러면, 선생님들은 기꺼이 친절을 베풀어 줄 텐데. 할머니가 ‘죽음이 덜 아프게 해 주세요.’라고 어딜 가서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고작 ‘우리 곁에 오래오래 있다가, 편안히 가게 해주세요.’라고 기대해 보는 것 말고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니 이럴 때, 주사가 그저 따끔할 뿐이라며 견딜 수 있는 만큼의 두려움만 꼭꼭 씹어 입에 넣어주는 것처럼, 할머니의 엄마가 나타나 말해주었으면. ‘세상과의 이별이 그렇게 아프지 않더라, 무탈하게 지나갈 테니 걱정 말아라.’라고 할머니와 우리를 조금 안심시켜 주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