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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구름 May 17. 2022

함께 존재한다는 기적

영화 그녀(her)



집에 오면 그날 있던 일 들려줄래? 말 많다던 동료 얘기며 점심 먹다 셔츠에 얼룩 묻힌 얘기며 잠에서 깰 때 떠올랐다 잊어버린 재밌는 생각이며 사람들 미친 짓 이야기로 같이 웃어도 좋고 늦게 퇴근해서 내가 자고 있어도 그날 했던 생각 짤막하게라도 속삭여줘. 당신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참 좋아. 곁에서 당신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 참 행복해. - 고객의 의뢰로 작성한 테오도르의 편지 중   

   


오랫동안 함께 마음을 나누고 성장해왔던 아내와 이별했다. 누군가와 삶을 나눈다는 기분은 꽤 괜찮은 것이지만, 상대가 멀어지거나 없어지면 두렵다는 테오도르. 언젠가부터 그의 내면 깊은 곳 어딘가 구멍이 나버렸고, 그 틈을 무언가로 가득 메우고 싶지만 잘 채워지지가 않는다. 새로운 만남을 시도해보기도 하고, 낯 모르는 이와 자극적 추구를 해보아도 결국 밀려오고야 마는 단절감. 다정한 글로 고객의 마음을 잘 전달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만큼의 따뜻함을 느끼기 어렵다.     



상처와 상실감으로 너덜너덜해져 무감각했던 이 남자의 일상이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와 만나게 되며 활기가 생긴다.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귀 기울이며 알아주는 존재.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거듭 학습하고 성장하며 진화하는 인공지능 사만다. 그는 자신이 사만다에게 어떻게 비추어질까 계산하지 않고,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게 된다. 메워지지 않을 것만 같던 구멍이 어땠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둘 만의 세상, 둘만의 언어, 서로만이 알아채고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순간들이 마구 쏟아져 내린다.      



널 사랑하듯 누군갈 이렇게까지 사랑해본 적 없어.     



그가 두려움 없이 마음속 풍경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사랑하기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인공지능인 그녀가 영원히 떠날 일은 없을 것이라고, 혹은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사만다는 단순히 프로그램이 아닌 순간순간 진화하는 인공지능이므로, 그녀 역시 인간과 동일하게 자신의 방식대로 세계를 구축하고 성장해 나갈 수밖에 없다.     




넌 내 껀 줄 알았는데.  
나 자기 거 맞아. 근데 시간이 가면서 내가 분산되는 걸 막을 순 없었어. 
넌 내 거야, 아니야?  
그런 게 아냐. 난 당신 거면서, 당신 거가 아니야.   



삶을 공유한다는 것은 얼마쯤은 서로를 소유한다는 말과도 닮았다. 어쩌면 서로의 세상이 하나로 포개져있는 동안은 상대가 나이고, 내가 곧 상대라는 환상 속에 살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단 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순간들이 지나고, 우리가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때서야 현실을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나, 너는 너. 결국 하나가 될 수 없는 우리가 각자의 외로움을 안고, 서로의 세상을 아주 조금씩 공유하며 살아나갈 뿐이라는 것.      



그는 사만다와의 만남을 통해 헤어진 아내와의 시간도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함께 나눈 사랑의 순간들 뿐이라는 것을 깊이 체감했으리라. 그가 앞으로 어떤 존재들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될지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구멍 난 틈을 억지로 메우려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캐서린, 사만다, 테오도르 모두 어딘가에서 어떻게 변하든 각자의 가슴 한 켠에 간직한 사랑으로 부디, 잘 지내기를.      


캐서린에게. 당신한테 사과하고 싶은 것들을 천천히 되뇌고 있어. 서로를 할퀴었던 아픔들, 당신을 탓했던 날들, 늘 당신을 내 틀에 맞추려고만 했지. 진심으로 미안해. 함께 해 왔던 당신을 늘 사랑해. 그 덕에 지금의 내가 있어. 이것만은 알아줘. 내 가슴 한 켠에 늘 당신이 있다는 걸. 그 사실에 감사해. 당신이 어떻게 변하든 이 세상 어디에 있든 내 사랑을 보내. 언제까지나 당신은 내 좋은 친구야. 사랑하는 테오도르가.           



(좌) 사만다와의 사랑 (우) 전 아내 캐서린과의 사랑




그녀(Her, 2014) / 영화 / 미국 / Spike Jon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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