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무관심과 최선의 다정함으로
“위에 교정기는 뺐어? 좀 편안해졌어?”라고 묻는다. 내가 치아교정의 세세한 이야기들을 했던가.
“지난 상반기에 이래저래 힘들었잖아요.”라고 말한다. 내 까마득한 좌절의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네.
어제가 오늘인지 오늘이 어제인지 헷갈리는 하루하루. 나를 내보이는 것이 피곤하고, 타인을 살펴보는 것도 버거운 분주한 일상. 모두가 바삐 살아가느라 정신없으니, 나의 자그마한 역사쯤은 기억하지 못해도 서운하지 않고, 알아주길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이야기했던 사실조차 잊었던 어떤 사소한 순간과 연결되면, 느닷없이 온기가 밀려와 깊이 감동하고 마는 것이다.
내 안에 흩어져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헐레벌떡 더듬어본다. 난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지금처럼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넣어두다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만 같다. 음식 사진은 잘 찍지 않았지만, 어디에서 무엇을 먹었는지 기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사적 역사를 메모장에 꾹꾹 눌러 되새겨본다. 우리들의 시간이 쉬이 흩어지지 않고 서로에게 오래 연결될 수 있도록. 따로 또 같이,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도록.
2023. 2. 16. 박00
-반려견 덕봉(9개월)
-4월에 대리 승진 예정
2023. 3. 29. 김00
-딸 9월 결혼, 아들 내외 곧 이민
-갓 태어난 손주 ‘귀엽다, 이쁘다’를 떠나서 ‘정말 소중하다는 느낌’
-남편분 아팠던 일은 괜찮다고 함
2023. 3. 30. 이00
-요즘 잠을 잘 못자고, 일을 줄이기로 함
-박사 논문을 쓸까 말까 고민하는 중
언젠가 이들을 만나면, 소장해 두었던 시시콜콜한 역사를 자랑스레 꺼내어 안부를 물으리라.
"박, 지금쯤 승진했을 텐데? 축하해요."
"김, 가족들 일로 바쁘죠? 만날 여유가 있나요?"
"이, 요즘은 잠을 잘 자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