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리더가 되는데 실패한 나는 오늘도 야식을 삼킨다
수년째, 건강 검진 결과를 통보받을 때면 빠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역류성 식도염"이다. 의사 선생님은, 밤늦게 먹는 것이 가장 나쁜 습관이니 가급적 저녁 식사를 일찍 마치고 야식은 자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집으로 향하는 내 머릿속에는 뭘 먹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배가 고프거나 허기를 느끼는 것도 아닌데, 잠들기 전에 뭔가를 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다.
배고픔으로부터 시작되는 식욕은 건강하다. 텅 빈 위장이 꼬르륵 소리를 낼 때 먹는 음식은 맛있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죄책감도 없다. 하지만, 늦은 저녁 시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느끼는 이 충동적인 식욕은 다르다.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이 아직 소화되지도 않았음에도, 나의 "뇌"는 어서 뭔가를 먹어서 이 찝찝한 기분을 유야무야 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나의 하루는 이렇게 마무리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에어프라이어도 나쁘다. 이렇게 간단하게 훌륭한 야식을 만들 수 있다니. 해 먹기 귀찮아서 그냥 자야겠다는 핑계도 못 대겠다. 에어프라이어가 냉동식품을 데우는 사이, 서둘러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내내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낀다. 아니, 이제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차가운 맥주 한 캔을 들고 재미도 없는 TV 앞에 앉아 야식을 먹는다. 눈은 TV 화면을 향해 있지만, 멍해진 머릿속은 엉망진창이 된 오늘 하루를 뒤적거린다.
오늘 오후에는 어떻게든 경영진에 보고를 해야 했다. 이번 주 중으로 의사 결정을 받아내야만, 내가 자리를 비울 다음 한 주 동안 문제없이 일이 진행될 것이었다. 주말이 끼어있는 연휴와 이어지는 이틀 간의 출장, 거기에 개인 사정으로 하루 연차까지 써야 한다니 마음이 조급하다. 건강 검진 결과 좋지 않은 소견을 받은 아버지께서 대학 병원 진료를 받으셔야 했다.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있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노부부가 단 둘이 진료실에 앉아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영 마음이 불편해서 연차를 쓰고 동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실무 담당자인 팀원과 업무 진행 일정을 논의한 것이 어제 오전. 팀원이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경영진에 보고할 자료의 전반적인 스토리라인을 구상하고 그것을 PPT 초안으로 만들었다. 최대한 보고 준비에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팀원의 작업 결과물을 바로 보고 자료에 끼워 넣을 수 있도록 나름 서두른 것이었다. 팀원에게는 부탁한 작업의 결과물을 오늘 오전까지만 보내달라고 했고, 어제 퇴근하는 그를 보며 작업이 얼추 마무리되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독촉하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리고 오늘, 역시나 세상은 나의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직 실무 경험이 충분하지 않은 팀원의 작업 결과물은 몇몇 선배 팀원들의 조언과 참견을 거친 뒤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내 손에 들어왔고, 그마저도 "특이 사항"이 없지 않은 수준이었다. 결국 경영진 보고는 미뤄질 수밖에 없었고, 내가 자리를 비울 다음 한 주 동안에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니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일정이 늦어져 죄송하다는 팀원에게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며 쿨한 팀장인 척했지만, 나의 미숙한 표정 관리 탓에 드러난 "괜찮지 않음"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아마도 오늘 하루종일 내 눈치를 보고 있었으리라.
첫 1년 간의 팀장 생활 끝에, 담당 임원과의 면담을 통해 팀장직을 내려놓고 싶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하지만 책임은 져야 하는 많은 일들이 가져다주는 스트레스와 부담감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도전이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팀장이라는 역할을 이어가야 했던 2년 차 팀장 시절, 나는 내 역할을 다시금 정의하는 방식으로 나름의 돌파구를 찾았다. 내 팀원들이 일을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 누구도 회사에서 부정적인 감정이나 불필요한 압박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일, 그것만 충실하게 하자고 다짐했다.
그 방법은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에 따른 책임감과 부담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대신 팀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으니, 팀장으로서의 나의 역할이 훨씬 가치 있게 느껴졌다. 그렇게 슈퍼맨과 같은 멋진 팀장이 되겠다는 다짐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이 역할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굳은 다짐이 가져다준 마음의 평화도 잠시, 진짜 슈퍼맨이 아니었던 나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하루의 끝에 찾아온 공허한 기분을 야식으로 달래야만 했다.
아무래도 역류성 식도염을 낫게 하려면, 과한 욕심을 버려야 할 듯싶다. 멋진 리더 그런 거 말고, 그냥 보통 팀장 노릇이나 잘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