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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Feb 27. 2021

얘들아 이건 진짜 캠핑카야

캠핑카 직접 운전해서 그랜드캐년 여행 가기

우리 가족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캠핑을 좋아했다. 하지만, 텐트를 비롯한 각종 캠핑 장비를 챙길 만큼 부지런하지 못했던 나는, 주로 캐러반(Caravan) 사이트를 찾아다녔다. 캐러반 캠핑장은 산이나 강, 해변가와 같은 자연에 인접해 있어서 굳이 숙소에서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다는 점이 좋다. 또한, 실내에 침대, 조리 공간, 화장실과 샤워실 등이 모두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텐트에서 지내는 것보다 잠자리도 편안하고 아이들을 씻기는 일도 번거롭지 않다. 아직 아이들이 어렸던 그 무렵, 우리는 마치 직접 캠핑카를 끌고 나온 것만 같은, 캐러반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감성에 푹 빠져 있었다. 심지어 우리 가족은 큰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 날에도 캠핑장에서 아침을 맞았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직 잠이 덜 깬 아이를 차에 태워 (아직 몸에서 숯불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로) 교실에 들여 보냈던 민망한 추억도 떠오른다.


하지만, 두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캠핑장을 찾아다니는 횟수는 점차 줄어들었고, 우리 가족은 한동안 캐러반을 잊고 지냈다. 아이들이 크면서 우리는 어디를 놀러 가든 공간이 넉넉한 방을 찾게 되었고, 아이들도 야외 수영장이 딸려있는 펜션을 더 좋아했다. 그렇게 더는 인연이 없을 것 같았던 캐러반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가족 여행을 준비하던 미국 생활 2년 차의 어느 날이었다. 빠듯한 휴가 일정과 넉넉지 않은 예산 한도 내에서 그랜드캐년 여행 계획을 세우느라 이런 저런 궁리를 해 보았지만, 성수기의 그랜드캐년에서 우리 가족이 지낼만한 숙소는 너무 비쌌고, 라스베이거스에서 그랜드캐년까지 이동할 렌터카를 구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그때 불현듯 캐러반이 떠올랐다. "어차피 숙소도 비싼데, 렌터카 따로 구할 필요 없이 내가 직접 캠핑카 한 번 운전해 봐?"


미국의 주요 국립공원에는 오토캠핑장이 잘 갖춰져 있다


막상 마음을 정하자, 캠핑카를 빌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RV Rental 업체 홈페이지에서 Standard형 (5인승) 캠핑카를 고르고 출발일과 도착일을 선택하면 대략적인 견적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음에 드는 차량을 선택하고 계약금을 납부하면 일단 예약 완료. 이번에는 그랜드캐년 국립공원 홈페이지에서 오토캠핑장을 찾아야 한다. 성수기임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아직 RV 캠핑 사이트가 몇 개 남아있다. 서둘러 예약을 마치자 뿌듯함이 밀려온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이들 방으로 달려가 자랑을 했다. "얘들아! 이번에는 진짜 캠핑카야!"




그렇게 약간은 충동적(?)으로 캠핑카를 예약하고 몇 달 뒤, 우리 가족은 흥분과 기대감을 안고 라스베이거스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RV Rental 회사로 가서 차를 픽업할 차례. 비로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내가 정말 저 큼지막한 것을 운전할 수 있을까? RV Rental 업체에 도착하자 약 30분 정도 동영상을 시청해야 한다며 교육장으로 안내한다. 화면에서는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주유하는 법, 차량 내부의 에어컨과 히터 가동하는 법, 캠핑장에서 상하수도 연결하는 법 등을 설명한다. (사실, 차량의 수평을 조정하는 방법을 포함해서 교육 내용이 제법 많았는데, 긴장한 탓에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교육을 다 받고 나서 서류를 작성하고, 옵션 물품(식기, 침구류 등) 구매 여부를 결정한 뒤 잔금을 결제하면 비로소 차키를 건네받는다. 떨리는 마음으로 사무실을 나서 차량으로 향하는데, 직원이 붙잡는다. "혹시 출발하기 전에 필요한 것 있으면 저쪽 구석에서 가져가세요" 직원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커다란 선반 위에 다양한 물품들이 놓여있다. 각종 양념통과 캠핑용 그릴부터 일회용품과 캠핑 의자까지, 앞서 차량을 반납한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을 모아놓은 곳인데, 원한다면 마음대로 가져가도 된단다. 이런걸 여행자들의 지혜라고 할까, 아니면 유머 감각이라고 해야 하나. 살짝 감탄하며 필요한 물건 몇 개를 챙겨 차에 싣고, 드디어 출발이다.  


차를 조심스레 움직여 도로에 진입하자, 역시나 가족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바닥에 고정되어 있던 캐러반이 아니라 도로를 달리는 진짜 캠핑카라는 사실만으로도 몇 배는 더 즐거운 표정이다. 한편, 행복해하는 가족들과 달리 운전석에 앉은 나는 핸들을 잡은 팔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역시나 캠핑카 운전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복잡한 라스베이거스 시내를 벗어날 때까지는 주변의 차량들이 신경 쓰여 차선을 변경하기도 조심스러웠고, 그랜드캐년으로 향하는 국도에서는 강풍에 차가 흔들릴 때마다 손에 땀이 배어났다. 그렇게 잔뜩 긴장한 상태로 5시간 넘게 운전을 해서 겨우 겨우 그랜드캐년에 도착했을 때에는 비로소 한 숨 돌리는가 싶었으나,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오토캠핑장에 도착해 배정받은 RV 캠핑 사이트에 주차하면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먼저 차량의 수평을 맞추고, 밤새 난방을 하기위해 전기선도 연결해야 한다. 상수도를 연결해 물탱크를 채워야 하고, 하수도 튜브로 차량의 오폐수(싱크대 하수와 화장실 정화조)도 비워야 한다. 도로를 달리는 진짜 캠핑카를 탄다는 것은 이 모든 번거로운 과정을 포함하는 그야말로 “일"이었다.


이동하는 중에 멋진 경치가 보이면 갓길에 차를 세운다


그렇게 “진짜 캠핑카”와 함께 고군분투한 첫날이 지나가고 다음날 새벽, 아직 해가 뜨기도 전에 나는 홀로 눈을 떴다. 미리 예약해놓은 계곡 관광 일정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 캠핑장에서 출발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직 가족들은 단잠에 빠져있는 시간. 옆 자리 캠핑족들을 깨우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차를 출발시켰다. 전날, 까만 밤하늘 위로 쏟아질 듯 가득 찬 별을 보며 늦은 시간까지 즐거워하던 아내와 아이들은 어지간한 차의 흔들림에는 아랑곳 않고 잘만 잔다. 가족들의 침대차가 된 캠핑카를 몰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길, 조금씩 날이 밝아오면서 주변의 풍경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핸들을 잡고 있는 내 팔도 어제보다는 한결 편안해진 느낌이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그랜드캐년의 장관이 시야를 가득 채우기 시작할 무렵, 마침 둘째가 잠에서 깨어 창밖을 쳐다보고 "우와!" 하며 감탄한다. 놓칠 수 없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갓길에 차를 세우고 가족들을 깨웠다. 그리고 저 멀리 떠오르는 해에 따라 시시각각 색이 바뀌는 그랜드캐년의 장관을 함께 감상했다. 첫째날의 고생스러움이 보상받는 느낌이었을까. 뿌듯한 마음에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며 가족들에게 생색을 냈다. "거봐, 이건 진짜 캠핑카라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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