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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Dec 08. 2023

이웃의 집에는 총이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총을 소유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산다는 것

1997년 12월의 어느 날. 나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흙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그보다 몇 배는 더 차갑게 느껴지는 K-2 소총에 뺨을 가져다 댔다. 가늠쇠 너머 저 멀리 보이는 표적을 노려보며 안경이 영 거슬린다고 느껴지던 순간, 사격 통제실 스피커를 통해 무미건조하고 서늘한 교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정간 단발! 준비된 사수부터 사격!”


이내 좌우에서 전우들이 사격을 시작하고, 내가 생각했던 총소리보다 훨씬 커다란 폭발음이 연이어 들려오자 나도 정신을 가다듬었다. 용기를 내어 검지 손가락에 힘을 실어 방아쇠를 당겼고, 그렇게 주어진 실탄을 모두 소진하고 나서야 얼얼해진 광대뼈를 어루만지며 사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처음 맡아보는 화약 내음이 꽤나 낯설다고 느끼면서도, 내가 누군가를 향해 총을 쏘는 법을 배웠다는 실감은 없었다.


훈련소를 나와 자대에 배치를 받고 2년 가까이 지급받은 총기를 휴대하고 때로는 정비하며 군생활을 했지만, 그것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딱히 없다. 오히려, 사격 훈련 때마다 그날 사격한 실탄과 회수된 탄피의 개수를 꼼꼼히 확인하고, 탄피가 모자라면 찾을 때까지 부대로 복귀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총기 소유가 불법인 나라의 군인"이라는 아이러니를 실감했을 뿐.




주재원 발령을 받고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접촉 사고가 있었다. 제법 빅매치였던 NBA 시합이 있던 어느 날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경기장을 빠져나온 차량들이 한꺼번에 도심에서 외곽으로 향하면서 여러 대의 차량들이 차선을 바꾸느라 혼잡하던 그때, 차가 살짝 흔들리는가 싶었다. 뒤편에 있던 차량이 다소 무리하게 차선을 변경하면서 내 차 뒷 범퍼를 살짝 추돌하고 지나간 것.


당연히 차에서 내려 사고 부위를 확인하고 사과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제법 연식이 되어 보이는 픽업트럭 운전석 창문 너머로 문신 투성이의 두툼한 팔 하나가 튀어나와 미안하다는 듯 손을 흔드는가 싶더니 이내 방향을 바꿔 혼잡한 대로를 벗어나 속도를 내는 것 아닌가? “저게 돌았나!" 핸들을 돌려 그 차를 따라가려던 순간, 옆자리에 앉아있던 선배 주재원이 나를 말린다. “따라가면 안 돼요.”


주 경계가 멕시코와 인접해 있어 유난히 불법 체류자가 많았던 텍사스에서는, 종종 접촉 사고를 내고 달아나는 차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경찰에 적발되어 강제로 추방당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으니, 섣불리 따라가다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 생각해 보니 그렇다. 이곳 미국은 총기 소유가 합법인 나라. 누군가와 시비를 붙을 생각을 하기 전에, 상대방이 총을 꺼내들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처음 미국에서 집을 구하고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는 바로 현관문이었다. 대부분 뒷마당이 딸린 2층짜리 단독 주택이었지만, 현관문은 하나같이 나무 재질에 구식 자물쇠 하나만 달려있는 구조였다. 철제 방화문에 전자 도어록이 달린 아파트에 살다 온 한국사람 입장에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반에는 누군가 문을 따고 (혹은 부수고) 우리집에 침입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몇 번이고 문단속을 해야 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 허술한 현관문을 열고 우리 집에 침입하지 않았고, 내가 그 이유를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집이나 현관문은 허술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집주인이 총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심지어 너무나 친절하고 선량해 보이는 우리 옆집 사람들조차도 말이다. 이방인인 내가 굳이 총을 가져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총기 소유가 합법인 나라에서 살고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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