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방인 Feb 13. 2021

스쿨존의 위엄

미국에서 운전할 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

일단 핸들을 잡으면 안전 운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같다. 신호 체계나 교통 규칙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국제 운전면허증이 있으면 미국을 여행하는 중에도 차량을 빌려 운전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또한 주(州)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내가 있던 텍사스의 경우 한국의 운전면허증을 공증받아 제출하는 방식으로 별도의 시험 없이 미국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다소 긴장하는 듯하던 와이프도 금방 미국에서의 운전에 적응해서 마트로 학교로 신나게 아이들을 태우고 다녔다. 오히려 주차 공간이 비교적 여유 있고 널찍하다 보니, 후진 주차나 평행 주차를 할 필요가 없다며 좋아했다.


미국에서 처음 중고차를 구입하던 날 (저 리본 때문에 두 번째 차는 다른 곳에서 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대체로 한국에서 운전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얼마간 미국에서 운전을 하다 보면 한국과 다른 점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 미국에 도착한 한국 사람들이 빨리 적응해야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Stop"이다. Stop 표지판이 보이면 운전자는 무조건 차를 정지시켰다가 약 3초 후에 출발해야 하는데, 이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냥 지나치거나 아니면 속도만 살짝 줄이고 완전히 정지하지 않아서 잠복중인 경찰의 단속 대상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Stop 표지판에서 차를 세우는 데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 단지 경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에는 한국에 없는 "All Way Stop" 교차로가 있다.


내가 처음 미국에 와서 운전을 하면서 감탄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All Way Stop" 교차로인데, 여기에는 신호등 없이 모든 진입로에 "All Way Stop" 표지판만 세워져 있다. 말 그대로 모든 방향에서 진입하는 차량은 우선 멈춰야 하고, 진입한 순서대로 교차로를 빠져나가는 방식이다. 가령 내가 교차로에 진입했을 때 사거리의 다른 방향에서 먼저 진입해서 멈춰있는 차량이 두 대 보인다면, 나는 그다음 순서(세 번째)로 출발하면 된다. 당연히 나보다 늦게 교차로에 진입한 차량은 내가 출발한 다음에 교차로를 빠져나갈 수 있다. 이 광경을 처음 접하는 내 눈에는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에서 차량들이 엉키지 않고 순서대로 진출입하는 모습이 너무나 질서 정연하고 좋아 보였다.

 



미국에서 운전하면서 신경 써야 할 또 한 가지는 스쿨존이다. 운전을 해서 출퇴근을 하다 보면 유난히 차량 소통이 원활해지는 날이 있는데, 바로 초, 중, 고등학교가 쉬는 날이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직접 차로 등하교시키다 보니 오전과 오후 특정 시간대의 학교 인근 도로에 정체 구간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정체 구간은 차량들이 많이 몰려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등하교 시간에 학교 주변 도로의 속도를 제한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내가 살던 지역의 경우 이 제한 속도가 시속 30km 정도였는데, 등하교 시간이 되면 스쿨존 표지판의 노란색 경광등이 요란하게 번쩍거리고 모든 차량들이 속도를 낮춘다. 교통이 특히 혼잡한 지역에는 경찰이 상주하기도 하는데, 이 제한 속도를 위반하는 차량은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는 등하교 시간이 되면 스쿨존 속도 제한 표지판 외에도 선생님들이 직접 안전 조끼를 입고 나와 교차로를 지켰다.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도보로 통학하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도록 선생님들이 직접 차량을 통제하는 것이다. 나도 가끔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줄 때면 그들과 반갑게 아침 인사를 나누며 고마움을 표시하곤 했는데, 등하교 시간의 스쿨존은 우리 아이가 길거리에서 다칠 일은 절대 없겠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철저하게 보행자 중심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차량들은 그저 순한 양처럼 (심지어 출근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스쿨존의 규칙에 따라 멈추거나 느릿느릿 움직였다. 원래 미국 사람들은 이렇게 매너 있게 운전을 하는 것일까?


아이가 다니던 학교 인근의 교차로 (등하교 시간이 아닐 때는 차량 소통이 원활하다)


미국은 우리나라처럼 적극적으로 음주 단속을 하지도 않고, 도로에 그 흔한 과속 단속 카메라도 거의 없다. (내가 살던 지역을 기준으로) 그렇다고 미국 사람들이 느긋하게 운전을 하는 스타일인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사람 나름이겠지만, 내가 목격한 미국 사람들 중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서행"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우리나라의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Interstate를 주행하다 보면 레이싱을 하듯 빠르게 달리는 차량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고, 조금이라도 앞차가 느리다 싶으면 보란 듯이 추월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한 사람의 두 얼굴을 보는 것과 같은 당혹스러움을 느끼곤 했다. 도대체 당신들 내가 "All Way Stop" 교차로랑 스쿨존에서 봤던 그 매너 좋은 사람들 맞아?


미국 사람들의 운전에 대한 나의 불편한 의문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작은 사건을 통해 비로소 해소되었다. 학생들의 등교 시간과 맞물린 어느 출근길 아침. 나는 우리 아이가 다니던 학교 앞 스쿨존의 우회전 차선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도 운전석에 앉아 선생님들이 교통을 통제하는 모습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던 중, 신호가 바뀌었다. 건널목에 보행자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우회전을 하려고 차를 천천히 출발시키려던 순간, 교통을 통제하던 한 여선생님이 큰 소리로 "욕"을 하며 내 차를 막아섰다. 아차, 아직 내 오른쪽 건널목의 보행 신호는 끝나지 않았다. 내 차 앞에서 경광등을 휘두르며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는 선생님의 호통은 한동안 이어졌고, 나는 등굣길의 학부모와 아이들, 그리고 다른 운전자들이 보내는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다.


죽을죄를 지은 것 마냥 화려한 "영어 욕"을 실컷 들어먹고 간신히 스쿨존을 빠져나와 직장으로 향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곳에는 수백수천 개의 교통 규칙 중에서도 절대 타협할 수 없고 용납되지 않는 최우선 순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다. 마치 Stop 표지판에서는 무조건 차를 멈춰야 하는 것처럼. 이렇게 엄격하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사회적 합의 덕분에 실수로 살짝 차를 움직인 내가 한순간에 "죽일 놈"이 되었다. 하지만 또한, 그 덕분에 아무리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던 차량이 우리 동네를, 우리 아이 학교 근처를 지나더라도 내 아이가 등하교 길에 다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스쿨존의 위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 아이 미국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