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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 Oct 01. 2019

한소끔 더 끓여줄래요?

이 세계에서 쓰는 말을 못 배우면 벌어지는 일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여유 있는 주말의 오전 시간.

9월의 가을 아침은 날씨가 좋다. 

아침부터 밤까지 안 예쁜 날이 없다. 

이런 날이 얼마 없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아쉽다.


쌀쌀한 아침저녁, 그리고 한여름 같은 점심. 

그렇기에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3 계절 패션.


봄에서 여름 - 반팔티

여름에서 가을 - 긴팔티

가을에서 겨울 - 두터운 니트

우리나라의 사계절 중 3 종류의 패션이 공존하는 유일한 기간이다.


기지개를 켜고 거실로 나가본다. 

한 줄기 밝은 햇살이 길게 늘어져 창문 안으로 쏟아진다.

도마를 두드리는 경쾌한 칼 소리와 가스레인지에 올린 냄비의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그립다. 


맞다. 


난 어제 된장국을 사놓았다. 

직접 요리를 해서 아침 한 끼를 해결할 예정이다. 


언젠가부터 끼니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어버렸다.

과거 수렵 시절, 선조들에게 있어 끼니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우리는 분명 그 시대보다 안락하게 살고 있는데.

왜 실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까?


분명 세상은 빨라지고 안전해졌는데, 항상 시간은 부족하고 불안은 더 커질까?

과거의 그들은 끼니 걱정 하나만으로 충분한 삶을 살았기에 급할일도 두려워할 일도 없었을 거다.


우리는 스스로 회사와 돈에 얽매인 노예라 하지만 과거의 서부의 노예와 결이 다르다 한다. 

과거 그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출퇴근을 한다는 건데. 

내가 주인공으로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살고 있는 우리는 그들과 확실히 다르다 할 수 있을까?


아침 식사만큼은 내 손을 이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필요한 재료를 준비해 놓고 하나씩 추가하며 조미료를 넣는다.

그때그때 필요하면 간을 보면 미묘하게 맛이 변한다.

맛의 스펙트럼을 경험하고 있으면 뭔가를 만들어낼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어 좋다.


'나도 뭔가를 창조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은 

세상의 일부로 태어난 내가 나름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가스레인지를 켜고 냄비에 물을 채워 올려놓는다.

냉장고에서 하나씩 재료를 꺼낸다.

어제 사온 시금치 된장국 제품의 포장지를 뜯고 안에 들어 있던 시금치를 씻는다.

조리법을 흘깃 쳐다보니 먼저, 적정량의 물을 냄비에 붓고 양념장을 넣어 휘이휘이 저으란다.

그리고 육수가 끓으면 이제 시금치를 넣으면 되는 듯하다.


육수가 끓어 시금치를 넣으려는 순간 처음 보는 문장에 잠시 멈췄다.


'... 한소끔 더 끓여주시면..'


한소끔, 나를 당황하게 만든 단어


한소끔.


다시 읽어봤다. 소금이 아니다. 한소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요리를 잘하지 않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다.

그 사이 육수는 보글보글 지옥불이 되어 다음 희생양을 데려오라며 성화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시금치를 넣고 좀 더 삶아보려 한다.


나름의 기준으로 이쯤이면 되었겠지 싶을 때 불을 껐다.

드디어 시식의 순간.


앗차, 이런. 시금치가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녹는다.

젓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조리법을 제대로 무시한 대가다. 


본인이 만든 요리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필요 없는 창의력을 발휘해서다.

조리법이 동봉되어 있는 한 우리는 창조가 아니라 모방을 해야 한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리고 잠시 검색을 해본다. 

'한소끔'은 어떤 의미일까? 


한소끔
(부사) 한 번 끓어오르는 모양


사전에 있는 표현대로라면 불을 잠시 줄이고 시금치를 넣은 후 

다시 불을 올렸을 때 시금치가 꿀렁 거리면 마쳤어야 했다. 


나름 요리하는 이 세계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요리 프로그램도 많이 보고 장도 직접 보고 종종 칼질도 하고 그랬다. 

그럼에도 부족했다.


관심의 세계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어가 존재한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쓰는 용어가 있다. '야마', '싸비', '뽕끼' 등.

그 세계 구성원들이 실수와 경험을 통해 만들어낸 단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만든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려면 

경험과 노력으로 쌓아 올린 언어들을 배워야 한다.

그런 언어들로 당신과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려는 노력도 없이 내 세계를 들이밀다 보면 

그 결과는 참담해진다. 

외톨이 또는 무관심으로 홀로 무리의 끝자락을 따라 돌기만 할 뿐,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좁은 의미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건 두 세계가 충돌하는 경험이다.

각자 살아온 삶의 궤와 결이 있기에 상대를 이해하려는 자세가 먼저다.

그 또는 그녀가 하는 언어를 배워야 그 사람의 중심에 들어설 자격을 갖게 된다.

진정한 이해가 이루어진 후에 관계는 돈독해질 수 있다.


과거의 나는 순간 감정에 휩싸여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언어에 폭력을 담아 전달하진 않았는지.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정말 괴로워 잠을 설치곤 한다.


우리는 때론 상대의 언어를 배우는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상대의 의도롤 왜곡하고 

내 안의 판사를 불러내 변호와 검증 없이 판단 내려버린다.


그리고 원하는 반응이 없으면 상대를 멀리하고 비난한다. 

나와 다르고 이상하다고.




영화 <넘버 3>에서 조직의 넘버 3인 태주(한석규 분)는 그의 여자 친구 현지 (이미연 분)와 동거하고 있다. 현지는 남자 친구인 태주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궁금해한다.


현지: '"오빠, 나 사랑해?
태주: "아니.. 야, 너 사랑이 뭔지 아니? 90% 이상을 믿는다는 거야, 난 너 그만큼 못 믿는다"
현지: "그럼 몇 프로나 믿는대?"
태주: "51%"


현지는 씁쓸하고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자신은 그를 정말 많이 100% 이상을 좋아하는데 그는 고작 51%라니. 


몇 프로 믿어? 51%


시간은 흘러 태주가 불미스러운 일로 교도소에 갇히고 현지가 그의 아들과 면회를 왔다.


현지: "오빠,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나 몇 프로 사랑해?
태주: "51%"
현지: "휴.."
태주: "야, 현지야, 너 아직도 모르겠냐? 내가 51% 믿는다는 건 100% 믿는다는 뜻이야.


조직 깡패 생활을 하는 태주의 세계는 배신과 배반이 일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100% 믿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 

항상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해야 한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 51%는 곧 100%다. 


현지가 그의 세계를 그가 쓰는 언어를 이해했다면.

처음 물어봤을 때 그의 남다른 사랑을 알아차렸을 텐데.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배우를 한 장면에 볼 수 있는 영화 <넘버 3>, 1997년 개봉


그 사람의 모든 삶의 배경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게 안타깝다.

그럼에도 서로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오해만 없애는 노력을 한다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 또는 관계를 더욱 돈독히 키워나갈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아침식사로 돌아온다. 

어찌 되었든 시금치 된장국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이렇게 만들기도 어렵다. 그리고 시금치의 숨이 정말 죽은 채로 끓여냈지만 육수만은 살렸다. 


조리법은 이제 알게 되었으니 버려버렸다. 

다음 시금치 된장국은 딱 맞게 한소끔 끓여낼 것이다.

    

그래도 맛은 괜찮으니



김현철 작곡의 <BOSSA GHETTI>는 영화 <시월애>(2000년 개봉) OST에 삽입된 곡이다.

같은 공간 다른 시간 속에 사는 두 남녀 앞으로 각자의 편지가 배달된다.

1997년과 2000년을 오고 가며 두 남녀는 그 시대에 사용하는 언어로 대화한다. 


이 곡은 스파게티도 아니고 보사(BOSSA)를 재료로 한 음악 국수다. 


다음엔 스파게티를 해볼까? 레시피부터 찾아봐야겠다.


https://youtu.be/BT_zEm1H5vE

시공간을 넘어선 두 남녀가 만나는 장소, 일 마레(ILL MARE)에 가고 싶다. 영화 <시월애> 2000년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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