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 있는 시간은 없다

<카우보이 비밥: 가나메데 비가 편>

by 박철

낡은 시계 속에 그녀를 가둬두었다


제트는 자신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 마냥 즐겁지 않았다. 그의 지난 연인 이나리가 아직 그곳에 있었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 그는 꼭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다.


왜 멈춰진 시계 하나 만을 탁자 위에 덩그러니 올려놓고 떠났는지. 그리고 그녀가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페이가 말한다.

'어이, 모든 여자가 자신을 기다려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


그녀의 말을 듣고 스파이크가 말한다.

'모든 여자가 당신과 같을 거라 생각하지 마'


이나리가 주인으로 있는 술집 앞에 제트가 서있다. 문을 열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예전 모습 그대로 그녀가 서있다. 제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작은 미소를 보이곤 인사를 건넸다. 그녀도 예전과 같이 맞이해준다.


'와서 술 한 잔해. 오늘이 마지막 장사하는 날이야'

시답지 않은 몇 마디 대화를 시도해본다. 예전 사랑스럽던 그녀 모습 그대로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제트는 그녀가 남기고 간 시계를 탁자 위에 꺼낸다.


'말해줘. 왜 멈춰져 있는 시계만을 놓고 떠났지?'

'제트... 멈춰있는 시간은 없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고, 이나리는 제트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네가 지금 이런다고 달라지진 않아!. 도망치지 말아!'

'제트.. 내가 왜 널 떠났는지 궁금해했지? 너와 있을 땐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어. 그냥 아이처럼 네 팔만 꼭 쥐고 있으면 그만 이었던 거야. 근데 말이야. 난 그게 너무 힘들었어...'


제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헛된 믿음. 그리고 그녀가 행복했을 거라는 착각.


그녀를 시간 속에 가둬두었다 생각했지만 진심은 그렇지 않았다. 애써 부정하려 했을 뿐.


시간을 초월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시간은 흐르고 당시에 옳다 믿었던 것들도 형태를 달리한다. 운동화보다 구두가 익숙해질 무렵 우린 우릴 지켜주던 부모의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스스로 세상과 싸워가며 성장한다. 예전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질 때 즈음 시간의 굵기 이상으로 성장했음을 확인한다.


멈추고 싶고 멈춰있는 시간은 없다. 시곗바늘을 부러뜨려도 시간은 정해진 눈금만큼 아무런 감정없이 흘러간다.



제트는 우주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넣어두었던 시계를 꺼내본다. 그의 방식대로 그녀를 추억했고 그 시계 속에 고스란히 그녀가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놓아주어야겠다. 바로 옆에 출렁이는 바다 한가운데로 시계를 무심한 듯 던진다. 그녀가 떠났을 때 진작 버려야 했을 물건이다.


이제 그는 자유다. 멈춰있지 않은 시간이 없음을 받아들이고 그는 스스로 만들어 낸 시린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졌다.





1998년, 일본 TV 시리즈로 방영된 <카우보이 비밥>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일본 대표 애니메이션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스토리, 색감, 주제, 음악까지 골고루 사랑받았다.


총 20여 편이 제작되었는데 당시로 많은 제작비가 투입되어 그 이상 제작할 수 없었다.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기에 아직까지 실사판이 나오지 못했다.


낡고 바래져도 그 모습 그대로가 좋을 때가 있다.


1998년 12월 25일에 방영된 <가니메데 비가(Ganymede Elegy)> 속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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