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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 Jun 25. 2021

노동은 고되도다

그래도 하루 잘 버틴 불특정 그대에게

어제 선풍기 타이머 설정을 깜박 잊었다. 휴대폰 알람이 울릴 때까지 선풍기 팬은 계속 돌고 있었다. 밤새 바람을 맞으며 잠들었고 목 안이 부어올랐다. 정말 지구가 망하기라도 했으면. 찬물로 샤워를 해도 머릿속은 멍하고 속은 더부룩해서 하루 쉬고 싶었다. 몸은 쉬고 싶었지만 오늘은 직장에서 보고할 거리가 있어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이왕 어차피 혼날 거 주사 맞는다 생각하고 과장님께 보고 문서를 들고 찾아갔다. 식은땀이 흐르고 머릿속은 혈액이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혹시 이건 안 물어보겠지? 하는 건 꼭 질문이 들어온다. 답변을 하고 해명을 하고 묵묵히 대답했다. 새로 이직한 직장은 처음부터 동료와 꼬여서 한 달이 1년 같았다. 바늘 끝 같은 촘촘한 지적을 듣고 나니 1시간 반이 지났다. 곧 점심시간이었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감히 위에 음식을 넣을 수 없었다. 


여러 숙제를 다시 받고 이제 일어나려는데 과장님이 부르신다.


'이곳에 아는 사람 많아요?'

난 대답했다.

'아니요.'

과장님이 물으신다.

'요새 점심 약속이 있다고 점심을 따로 계속 드시길래'

'아.. 요즘 속이 좀 안 좋아서.. 밖 음식이 좀 자극적이라서.. 당분간 구내식당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음.. 잘 적응하고 계시는 듯해 보이지만..'


사실 자리에 앉아 있는 말 못 할 스트레스가 커서 점심시간 만이라도 홀로 쉬며 에너지를 충전하고 싶어 구내식당을 이용하고 지하 주차장에서 쪽잠을 자고 왔었다. 그래야 좀 버틸 수 있을 거 같았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1차 보고를 끝냈고 자리에 돌아와서 잠시 의자에 기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잠시 감았다. 5초 안 되는 짧은 시간이 지나갈 무렵 암흑 사이로 한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노동은 고되도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여러 방식이 있다. 심장 뛰는 소리를 들려주거나 몸을 움직여 보여주거나. 만약 누군가 내게 네가 살아있음을 증명해봐라 한다면 통장 계좌 잔고를 보여주려 한다. 일을 하고 있고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니 살아있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6시가 좀 지나고 사무실을 나왔다. 회사 앞 도로가 불금을 재촉하는 퇴근 차량들로 혼잡스럽게 뒤엉켜있었다. 하루 종일 식은땀을 많이 흘려서일까. 셔츠가 눅눅해져 있었다. 나도 빨리 집에 가서 샤워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아파트 공동출입구 비밀번호를 입력하였다. 주차할 때 출입구로 방금 들어간 소년이 생각났다. 아.. 엘리베이터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야겠구나 생각했다. 모퉁이를 돌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하는데 아까 봤던 소년이 얼굴을 빼꼼 내밀로 열림 버튼을 꾸욱 누르고 있었다. 


얼른 엘리베이터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내가 '고마워요'하기도 전에 먼저 소년이 다급하게 말을 건넨다.


'아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 들렸어요. 그래서 제가 이거 안 닫고 있었어요'

'아 그래요? 너무 고마워요, 착하네요 ㅎㅎ'

'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 듣고 있었어요'


난 11층. 그 친구는 16층. 내가 먼저 내리네. 11층이 열리자 내리면서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아 네! 고맙습니다.' 


소년이 끔뻑 배꼽인사를 한다. 내 뒤를 보고 또 한 번 인사를 건넨다.


'안녕히 가세요'(배꼽인사 3번째)


현관 복도를 지나오면서 내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오늘 하루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안 좋았던 생각과 기억이 사라졌다. 방금 몇 분 전만 해도 직장인의 애환을 담은 슬픈 영화에서 주인공이 되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는데 말이다.


16층 소년. 또 한 번 보고 싶다. 이번엔 몇 학년이냐고 물어볼까? 아님 여자 친구 있냐고 물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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